영화 <호랑이와 눈, 2005>의 감독이며 주인공인 로베르토 베니니는 늘 비극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기쁨과 웃음이 있는 영화를 만든다. <인생은 아름다워, 1997>에서도 그랬듯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모든 일이 잘 될 거라 희망을 보여준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단지 긍정적인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긍정의 에너지를 나누어 준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호랑이와 눈>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긍정의 힘’을 발휘한다. <호랑이와 눈>에서 로베르토 베니니는 시인이자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아틸리오로 나온다. 그는 매일 밤 꿈에 비토리아라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리지만 현실의 비토리아는 베니니에게 “눈 속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당신과 살겠어요”라는 대답만 반복할 뿐이다. 로마에 눈 그리고 호랑이 모두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던 어느 날 바그다드로 떠났던 비토리아가 폭발 사고로 혼수 상태에 빠졌다는 연락을 받는다. 망설임 없이 로마에서 바드다드의 병원으로 날라간 아틸리오는 비토리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행에 옮긴다.
우리들이 별개로 논의한 지피와 지기는 결국 둘이 만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상황을 나 혼자가 아닌 남과 함께 살아간다. 지피지기에서 피(彼)는 개인일 수도, 가족일 수도, 시장일 수도, 사회전체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불확실성은 누구나 어려움을 겪는 상대다. 이 상대를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우리 자신을 알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지식과 지혜를 준비했다. 이들은 당연히 실행을 통해 가치를 발한다. 실행이나 행동은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갈매기의 꿈>의 저자 리차드 바크Richard Bach의 말처럼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실행과정에서 우리는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결과를 만난다. 그러나 실행하지 않으면 늘 실패와 살아가야 한다.
성공한 사람과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의 차이는 단 하나 ‘실행’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성공을 위한 비법을 모두 알고 있더라도 그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 비법이란 것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들어오던 평범한 것 하나라도 꾸준히 실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느 수준에 이르게 된다. 세상이 모두 알아 줄만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긍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다고 말한다. 단 긍정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겼을 때만 그렇다. <호랑이와 눈>의 아틸리오는 자신의 여인을 위해 무엇이든 해낸다. 병원에 앉아 걱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묘약을 찾아 헤맨다.
유학자이며 양명학을 주창한 왕수인에게도 ‘앎은 행함의 시작이요, 행함은 앎의 완성’이었다. 그는 몇날몇일을 대나무 숲 앞에서 대나무만 바라본다. 선배학자 주희의 가르침대로 대나무가 가지는 이치를 깨우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는 “대나무를 아무리 쳐다 본다고 해도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어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치를 먼저 깨닫고 나중에 행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깨우쳤으니,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둘이 아니고 본래 하나’라고 가르친다. 언젠가 밤이면 청계천의 쓰레기를 주어 담는 ‘파란 눈의 청소부’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홍익인간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쓰레기를 줍는 일을 선택했다고 한다.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홍익인간이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그는 “제가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무슨 뜻인지 압니다”라고 답했다. 기자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알고 그를 행하고 있다는 데야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문제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기는 일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런 실행들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어 준다는 데도, 꿈적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믿음이 없는 것이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성경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익이 없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믿음이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며, 그런 강한 믿음이 있다면 행동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게으름까지 더하면 실행은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 모두 가만히 나두면 나태해지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적용되어, 노력 없이는 점점 무너지고 부숴지게 되어 있다.
두려움도 사람들이 실행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다.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Ernst Ingmar Bergman은 “사고에도, 감정에도 한계선은 없다. 단지 두려움이 한계선을 만들 뿐이다“라고 말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동을 포기하거나 망설이게 된다. 두려움이라는 것도 사실은 인간의 본성에 해당한다. 여러 번에 걸쳐 인간은 긍정적인 것 보다 부정적인 결과에 비중을 더 두게 진화해 왔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왔다. 생존과 관계 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굼벵이들에게>의 저자 리타 엠멋Rita Emmett은 “어떤 일을 두려워하면 그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고 조언한다. 간혹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엄청나다고 처음부터 겁을 먹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조금씩 행동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일은 마무리 되면서 그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2007년 태안반도의 원유유출 사건이 그런 예가 될 수 있다. 기름으로 검게 변한 해안과 바위를 보면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저 기름을 다 닦아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주민과 자원 봉사자들이 달려들어 기름을 딱기 시작하자, 조금씩 자연은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며칠이 지나면서 이제 기름보다 바위의 원래 색이 더 많아지면, 사람들은 희망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끝이 보인다. 아마도 자연이 시간을 가지고 나머지를 완성해 줄 것이다.
행하기 전에 완전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는 완벽주의도 실행을 방해한다. 완벽주의도 사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신은 다르다는 교만함 때문에 생긴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진화한다. 한번의 실행에서 우리가 추구할 것은 지금 보다 ‘더 나아짐’이지 ‘완성됨’이 아니다. ‘완성됨’이란 내가 아니라 시간을 포함한 내 주변의 환경이 해결해 주는 것이다. 미래를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다는 것도 신화일 뿐이며, 장기계획도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을 가지지 않는 한 실효성이 없다. 미래에는 꿈과 비전이 있을 뿐이다. 그런 꿈이 실행을 통해 점차 우리가 계획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들어 온다.
알지만 확실한 믿음이 없어서, 본성적인 게으름으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행은 지연되고 만다. 반면 완벽한 준비가 없이도 실행에 옮겨야 하는 데는 최소한 네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실행이 최선의 훈련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실행이라는 투자를 통해 이익이 생기고 습관이라는 수익구조가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셋째로 자신감을 키워내기 위해서다. 넷째로 그 일이 다시 오지 않는 기회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골프나 테니스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초보 학생들에게 한동안 게임이나 라운딩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조언한다. 옳은 자세가 굳혀지기 전에 게임을 하면 자세를 망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늘 정답은 아니다. 실행은 상대방과의 대화이다. 실전을 통해 나 혼자가 아닌 상대방이 있을 때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그런 경험만이 실행을 위한 훈련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테니스에서의 상대방은 단순히 테니스 코트 저 편에 있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테니스 코트의 길이, 바닥, 네트, 그리고 복식이라면 내 쪽 코트에 있는 파트너도 모두 상대방이다. 게임을 통해 우리는 그 모든 상대방과 대화를 시도한다. 골프라면 잔디, 바람, 경사, 나무, 그리고 동반자, 도우미까지 모두 상대방이다. 여기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그 많은 날의 훈련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실행 후 다시 생각하고 훈련하는 일이 반복되어야만 한다. 테니스 시합을 마친 후 연습을 한다던가, 골프 라운딩을 끝내고 연습장으로 달려갈 수만 있다면 거의 끝났다고 봐도 된다. 시험 전에 열심히 공부하는 것보다 시험을 마친 후 복습을 하기만 한다면 보다 나은 실력을 키울 수 있지만, 역시 쉽게 실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여하튼 생각하고 훈련하고 실행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점차 한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대가가 되어간다.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스스로 행동에 옮겨 보아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실행은 그 자체가 미래를 위한 투자임으로 수익이 따른다는 점이다. 더구나 실행은 복리의 결과를 얻는다. 복리란 이자에 이자가 붙으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재산이 증가하는 마술을 부린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에는 그런 복리 상품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구조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런 능력이 있는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실행은 언제나 복리로 수익을 돌려준다. 실행을 통해 결과를 얻어낼 뿐 아니라, 경험에 의한 지식이 습득되고 습관이 만들어 진다. 거기다 경력이 쌓이고 명망이 생기기 시작한다. 단 단리이자와 복리이자의 차이는 투자기간이 10년이 지나야 마술을 부리기 시작한다는 조건이 있기는 하다.
생각하고, 훈련하고 실행하는 것들이 반복되면 우리에게 습관이 생긴다. 습관 그 자체가 지속적인 실행의 결과인 동시에 다음 실행을 위한 에너지가 된다. 실행에는 운동의 관성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행동한다는 것 자체가 힘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또 움직임에 관한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정지 상태에 있는 바위를 움직이게 하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반대로 굴러가고 있는 바위를 멈추게 할 때도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구르기 시작한 바위에는 작은 힘만 가지고도 가속도를 붙일 수 있다. 처음으로 무엇인가 실행에 옮기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첫 번째 실행에 옮기고 나면 점차 가속도가 붙게 되어 있고, 결국은 습관이 만들어 진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우리는 멈추지 않는 바위가 된다. 습관 자체가 우리의 에너지가 되는 셈이다. 의식보다 효율적이며 지속적인 무의식에 업무를 위임해 놓은 덕분이다. 습관이 생기면, 우리는 변화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변화된 것을 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아리스토델레스의 말처럼 ‘사람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에 따라 판명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우수성이란 단일 행동이 아니라 바로 습관’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즉 한 사람의 인격은 단 한번의 행동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행위에 의하여 평가된다는 것이다.
지속되는 실행 속에서 우리도 모르게 자신감이 자라난다. 반면에 완벽하게 준비해서 정말 잘하려는 계획은 늘 허무하게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런 것이 보통 사람들의 경우다. 한번에 너무 높은 성과를 바라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기 능력에 적합한 정도의 성과를 기대한다면, 쉽게 행동에 옮길 수 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정상으로 가면 자신감이 거의 절대적이다. 모든 스포츠는 멘탈 게임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듯하다. 자신감 없이는 골프의 모든 스윙이 완성될 수 없다. 테니스도 마찬가지다. 자신 없이 하는 스윙은 스윙에 있어 결정적인 팔로우 드로우가 생략되고 그 결과 역시 형편없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감은 훈련과 실행의 반복에서 얻어지는 종류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기회에 해보지” 하는 생각으로 망설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잘 주어질 리 없다. 더 잘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찬스가 온다. 실전에 연습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는 말이다. 프랭클린 플래너의 개발자이며 <성공하는 시간관리와 인생관리를 위한 10가지 자연법칙>의 저자 하이럼 스미스Hyrum Smith는 시간에 대한 첫 번째 착각은 ‘우리가 지금보다는 언젠가 미래의 어느 때에 더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될 것‘ 이라고 생각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다음 주에 다음 달 아니면 내년에 더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고 또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시간을 저축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실제로 누군가 매일 아침 우리에게 86,400초를 입금해 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당일이 지나면 이 계좌에 잔액이 남아 있지는 않다.
더 나은 성과를 위해 실행과 동반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목표의식, 긍정, 열정 그리고 인내와 같은 것들이다. 꿈꾸는 사람과 실천하는 사람의 차이는 지속적이고 목적의식을 지닌 행동에 있다. 실행이 모든 성공적인 변화에 필수조건이라면 목표는 실행을 성공으로 이끄는 나침반에 해당한다. 지식의 피라미드 정점에서 우리는 세상과 만났다. 지식이 단순해지면서 실행력을 가졌듯이, 생각이라는 것도 점차 구체적인 것이 되어야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신에 피라미드라는 것이 있다면 그 역시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지는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초가 되는 믿음이나 신념 그리고 가치나 원칙들이 밑에서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어야 한다. 그런 가치나 원칙을 우리는 보통 자아관,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지기(知己)는 자아관을 얻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거기에 자신을 어떤 존재로 여기고 받아들이냐 하는 개인적인 믿음을 통해 굳건해진다. 반면 세계관은 지피(知彼)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곳에 의의와 가치를 부여한 총괄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자아관과 세계관은 다시 우리의 가치관을 구성하며, 이런 가치관이 우리의 선택과 실행 그리고 삶의 자세를 결정한다. 그 중에 긍정적인 자세는 이미 논의한 대로 무의식의 힘을 끌어내는 에너지에 해당한다.
<호랑이와 눈>의 아틸리오는 긍적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만나는 사람과 닥치는 모든 상황 속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고 문제점을 고민하기 보다는 해결점에 집중한다. 긍정적인 사람에게는 늘 웃음이 있기 마련이며, 아틸리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의 힘을 나누어 준다. 긍정이란 전염성이 있는 감정 중에서도 가장 감염성이 큰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 옮겨 심은 나무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을 향해 “이런 봄날에는 쇠꼬챙이도 살아난다”라고 하는 말 한마디가, 용기가 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더 나아가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며 삶을 즐길 줄 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이란 당연히 열정을 동반하고, 그런 자세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이 성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실 이런 말들은 너무 자주 들어,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해야 할 말은 “지금 당장 시작하라”라는 것이다. 서둘러 아무 것이나 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익혀 알고 있는 것들 중 확신하고 있는 것들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열망하는 것부터 실행하자는 말이다. 시작만 한다면 실행을 방해하는 게으름과 두려움이 극복될 뿐 아니라, 조금씩 성과를 얻으면서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실행의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존재나 예상하지 못한 사람으로부터의 도움을 얻어 낼지도 모른다. 생각에 집중하여 몰입하다보면 생각하지 못했던 ‘기적 같은 우연(Serendipity)’을 만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성공이나 승리를 경험해 본 많은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과학적인 검증이나 보편타다성의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귀납적 결론을 얻어 낼만한 충분한 사례를 우리의 주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본성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이기적인 동기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신이 우리에게 보내준 축복의 결과일 수도 있다.
성공학을 파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도움의 손길’을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도움의 손길’은 놓친 채 눈에 보이는 결과만 가지고 ‘비밀’을 발견한 듯이 떠들어대기도 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을 눈치챘다고, ‘비밀’을 알아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제임스 앨렌이 이야기하는 ‘생각의 인과법칙’, 로버트 콜리어의 ‘성취의 법칙’, 클로드 브리스톨이 주장하는 ‘신념의 마력’ 그리고 그들로부터 진화되어 나타난 ‘긍정의 힘’과 비밀스럽게 보이기 위해 베일을 쓰고 나타난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것 모두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모든 법칙이나 원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노력’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도움의 손길’,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결국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의미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공학의 대가들은 하늘의 뜻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확신에 찬 믿음과 긍정의 힘으로 ‘도움의 손길’이 스스로 다가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공학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은 그 도움의 존재를 ‘투명인간’이라고 부른다.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독일의 시인 괴테Johann Wolfgang Goethe는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나오는 도움의 손길을 ‘신의 섭리’라고 노래한다. 몇 번의 그런 도움을 받아 본 나 자신 역시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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