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 제 3 교시: 통계학 시간 – 최고에 희망을 최악에 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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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러들럼의 베스트셀러 ‘제이슨 본’은 3부작 소설로 각각 2002년 <본 아이덴티티>, 2004년 <본 슈퍼리머시>에 이어, 2007년 <본 얼티메이텀>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어 흥행에 성공한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최고의 암살요원 제이슨 본(맷 데이먼)은 작전 수행 중 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는다. 하지만 제이슨 본은 국방부 산하의 극비조직이 만들어낸 비밀요원 1호이자 CIA의 음모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CIA입장에서는 반드시 제거되야 할 인물이다. <본 얼티메이텀>에 새롭게 등장한 CIA 국장 에즈라 크레이머(스콧 글렌)는 주인공 본을 살해하도록 지시하면서 한마디 한다.

“나의 제 1신조는 최고의 상황에 희망을 가지는 동시에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거다(My number one rule is hope for the best, plan for the worst).”


똑 같은 노력을 쏟아 부은 결과가 늘 같지 않다. 나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 이외의 모든 환경이 함께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전략적 움직임을 꾀하지만, 우리 주변도 수시로 변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 결과가 늘 한결같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최선의 결과도 나오고 최악의 결과가 도출되기도 한다. 최선과 최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이에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프랙탈의 연속이며 몇 가지 구성원소로 이루어 졌다고 하더라도, 늘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곳에 불확정성이 깔려있고 불확실성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자보다 작은 세계는 불확정성 원리가 지배한다”는 양자 물리학자들의 주장에, 아인슈타인은 “창조주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일축해 버렸다. 하지만 전자로 구성된 작은 우주는 ‘우연과 확률의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양자역학이론에 의해 밝혀지면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세상에 내놓고도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 중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조롱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확률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면, 자연의 법칙은 불확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일한 조건하에서 매번 똑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유사한 몇 개의 유형을 보이는 고만고만한 현상이 나타나지 아주 엉뚱한 것이 나타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가 세상은 모두 다른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송강호는 그렇지만 잘 정리해 보면 모두 비슷한 것이라고 답을 한다. 모두 다른 길을 유형별로 분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패턴을 발견한다. 패턴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구성된 요소간의 차이점과 공통점 그리고 그 관계를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많은 선조들의 노력으로 생명체에 대한 비교적 단순한 지식을 즐기고 있지만, 생물의 분류라는 작업이 그 결과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생명체의 분류 자체가 생물분류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될 정도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월 스트리트’의 신문을 인용하여 세계에는 대략 1만 명 정도의 분류학자가 활동하고 있지만, 그 정도도 충분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의 생물에 한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버라 매클린턱은 평생을 옥수수와 씨름했다. 제인 구달은 <침팬지와 함께한 나의 인생>이란 책을 남겼을 정도로 침팬지를 연구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생활했을 정도다. 이들은 그나마 생물학계에서는 이름이라도 남긴 사람들이다. 하지만, 별로 쓸모가 없는 이끼류나 달팽이에만 평생을 매달렸던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


이들이 한 종류의 생물세계에 집중하는 이유는 하나의 생물이 가지는 질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생물은 수많은 질(質)을 갖고 있으며 한번에 그것을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질이라는 것은 특성 또는 특질이라는 말이다. 생물과 사물은 크기, 모양, 색, 움직이는 속도, 감각의 정도, 에너지 흡수 방법 등 셀 수 없을 정도의 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의 생물학의 계통수는 근원이 가깝고 비슷한 것들끼리 모아둔 것이라는 기준이 있지만, 분류의 근거는 형편없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기준으로 분류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과 식물은 ‘움직이고 있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식물과 균류(Fungi)는 ‘광합성을 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원핵생물과 진핵생물은 ‘세포 내에 소기관이 없느냐 있느냐’로 구별하는 등 매번 다른 기준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DNA라는 관점에서 보면, 생명체간에는 큰 차이가 없다. DNA수준의 미세한 단계까지 내려가면 모든 생명체가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생명체는 다양한 특질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런 특질에 따라 여러 시각에서 분류해 보는 것은 자연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여러 특질을 한번에 비교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를 집중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동물을 달리는 속도에 따라 분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크기에 따라 정리할 수도 있다. 특질을 수치화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특질에 집중하면 통계학을 활용해 관찰의 대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통계만 사용하여도 이 세상은 단순해지기 시작한다. 아니 통계 자체가 단순화를 위한 기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생물체의 다양한 종을 하나의 특질로 비교할 때와는 달리 같은 종끼리의 차이를 관찰해 보면 평균이라는 개념이 더욱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만나는 자연의 생물 대부분 정규분포의 형태를 가지기 때문이다. 통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규분포 하나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매우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규분포란 평균값에 대부분의 개체수가 모여 있고,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개체수가 작아지는 분포의 하나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좌우대칭으로 종모양이 되어 벨 커브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현상의 대부분은 이런 종모양의 분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아이큐라고 부르는 지능지수는 평균을 100으로 하고 표준편차를 24로 하는 정규분포를 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값이 정규분포를 따른다면 그들의 평균으로부터 표준편차만큼 떨어져 있는 구간 내에 데이터의 약 68%, 평균으로부터 표준편차의 두 배만큼 떨어져 있는 구간 내에 약 95%의 데이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아이큐의 경우 76부터 124사이에 있을 확률이 약 68%이며 52부터 148사이에 있을 확률은 약 95%라는 이야기다.

평균값이라는 것이 관찰대상의 대표값으로 가치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이 그 근처에 모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관찰대상이던 간에 이상치(Outlier)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자는 용맹한 동물이다. 그러나 그 무리 중에는 그렇지 못한 사자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밖으로 나가 주변을 돌아보아도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주 겁 많은 강아지가 있는가 하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강아지도 있다. 갈매기 중에도 리처드 버크의 조나단 같이 용감한 갈매기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평균 갈매기로 살아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평균적으로 몸과 마음이 성장하고 또 눈과 귀의 기능이 떨어진다. 이처럼 정규분포를 가진 자연현상에서 얻어진 평균값은 그 집단의 대표값으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물의 빠르기에 대한 평균 속도를 알고 있다면, 그 평균값으로 동물의 세계에 대하여 좀 더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제 대부분의 자연에서 만나는 현상을 평균값으로 받아들이되, 늘 평균에서 멀리 떨어진 존재도 있다는 것만 명심하면 된다. <본 얼티메이텀>의 CIA 국장 스콧 글렌의 말처럼 최고와 최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평균, 최고 그리고 최저 여기에 분산 정도만 파악한다면 우리는 관찰대상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대안들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간은 100m를 9초74에 뛴다. 시속으로는 37km 정도다. 보통 성인 남성이 100m를 14초 내외로 뛴다면 대충 시속 25km로 달린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100m를 달리듯 뛰어갈 수는 없다. 마라톤 세계기록 보유자인 케냐의 터갓이 42.195km를 2시간 4분55초에 주파했으니 시속으로는 약 20km의 속도로 꾸준히 뛰었다는 얘기다. 우리 인간은 시속으로 최고 20Km에서 25Km로 달릴 수 있는 셈이다. 반면 육상 동물 중에서 가장 빠른 치타는 최고시속 112km로 질주한다. 100m라면 3초에 주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동물의 왕국’에서 주로 사자의 먹이로 등장하는 영양도 최고시속 90km로 달린다. 최고시속 70km 정도인 사자가 매복이나 협공을 하지 않으면 따라잡기 쉽지 않은 차이다. 만약 우리가 재미로 동물과 인간의 속도를 알고 싶다면, 이처럼 평균값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가 치타를 잡아야 한다든가 사자에게 쫓기고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치타 한 마리를 잡는 것이 목적이라면 약 112km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면 충분하다. 모든 치타가 112km로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치타 무리 중 가장 늦은 치타를 쫓아가면 된다. 반대로 사자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면, 우리는 최소 70Km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장비가 필요하다. 평균보다 빠른 사자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CIA 국장 크레이머가 “최고 상황에 희망을 가지는 동시에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이유로 평균으로 관찰대상을 이해해야 하지만, 최선과 최악의 경우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평균이란 어떤 의미로 기대치라고 부를 수 있다. 향 후 벌어질 수 있는 상황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수치이기 때문이다. 사업에서 얻을 수 있는 기대수익은 그 사업의 특성을 잘 나타낸다. 하지만 실제로 사업을 하다 보면 최악의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런 경우에 대처할 수 있거나 감수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면, 평균값은 커다란 의미가 없다. 반면 사업을 수행 중에는 최상의 결과를 기대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가짐이 중요할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이런 시각은 학문이나 정책에서도 그리고 일상에도 적용될 수 있다. 평균이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지만, 실제로 현실을 만났을 때는 평균보다 더 안전한 기대치에 집중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합리적이라고 가정한다. 사람은 감정에 휩쓸리지도 않고 계산에 착오도 없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매우 똑똑한 사람들만이 경제학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인정하듯이 현실에서의 사람은 모두 합리적이지는 않다. 평균적으로도 보통 사람들은 경제학이 가정하는 정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합리적이라는 가정은 시장에서 매우 안전한 가설이 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시장에 모여서 가격을 결정할 때 합리적이지 않은 사람 몇 명이 있다 해도 결과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유로 인해 비합리적인 개인이 존재하지만 합리성을 전제로 한 이론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이기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은 이기적인 면과 이타적인 면 모두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세상에는 상식적인 수준의 균형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 것이 평균이다. 하지만 일상에서의 우리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는 특징에 채널을 맞추어야 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말이 평균을 표현하고 있지 못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장 위험이 없는 사람에 대한 가설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법과 제도가 이타적인 사람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도 이기적인 몇 명만이 이익을 얻게 될 뿐 아니라, 이타적인 사람들은 점점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삶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사람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베풀고 나누어 주는 것에 대해 매우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도 사랑을 베풀고 나눔을 가지면 그 사람과 우리의 사이는 매우 바람직하게 발전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그 사람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런 경우에는 많은 문제 들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 이타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사실은 이기적이어서 우리에게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처를 받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나쁜 사람이라고 욕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 사람이 실제로 희생정신이 많은 사람이어서 많은 것을 나누어 준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감사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이 합리적이며 이기적이라는 사실이 비록 평균을 나타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가정하는 것이 학문을 연구하거나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가 된다. 우리의 일상을 <본 얼티메이텀>의 CIA 국장 크레이머의 말에 적용시켜 보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착한 사람이라는 소망을 가지되, 나쁜 사람들일지도 모르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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