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 주연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는 매년 발표되는 흥행순위, 늘 100위안에 드는 영화다. 영화가 만들어진 지 이미 70년이 다됐다는 것을 감안하면, 세계 최고의 영화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한 영화평론가는 “미국에는 두 개의 영화가 있다. 그 하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나머지들’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여자 주인공 스칼렛이 남자 주인공 레트을 떠나 보내며 농장의 불타는 노을을 배경으로 한마디 한다.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나름대로 정말 단순한 눈을 가지고 세상을 돌아보았지만, 세상은 정말 복잡하다. 1,400억 개의 은하수가 존재하는 광대한 우주, 탁구공을 1억 분의 1로 잘라낼 정도의 작은 원자로 만들어진 경이로운 물질, 60조 이상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 인체의 신비, 80억이 넘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역동적인 인간사, 이 세상은 정말 복잡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세상을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팽창하고 있다는 우주로부터, 어제 저녁 쓸데없이 화를 내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나 자신까지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아름답고 열정적인 스칼렛이 세 번째 남자를 떠나 보내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
인생은 운명이나 우연히 만나는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성공한 사람들 모두 미래에 대한 혜안(慧眼)이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들 대부분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들을 비하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폴레옹은 늘 “나는 능력 있는 장군보다는 운 좋은 장군이 더 좋다”고 말했단다. 사실 운이 얼마나 필요한지 세상을 좀 살아본 사람들은 다 안다. 따라서 복잡한 일이 만나지면, 그냥 “내일 생각하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내일이면 운이 좋아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운이 좋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공하는 데 필요한 덕목 중 최소한 하나는 꾸준히 훈련하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때를 만나면 바로 그것이 운이다. 그렇게 그들은 성공한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나는 행운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행운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해준다.
만약 열심히 살아온 우리 중에 자신이 받아 든 인생의 성적표가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라도 아직은 운이 없다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우리에게 “우리의 노력이 모두가 아니라도 그리고 원하였던 시점이 아니라도 언젠간 결실이 되어 나타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세상이 정말 복잡하고 불확정적이지만 그렇다고 카오스 즉 혼돈의 상태는 아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듯’ 우리들이 마주치는 자연현상과 인간의 삶에는 많은 규칙이 내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규칙을 찾아내려고 노력해 왔으며, 심지어는 단 몇 마디로 우리 삶의 원리를 설파하려 한 사람들도 있다. 비록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그들의 노력덕분에 이제 우리는 자연현상과 인간의 삶에 대해 비교적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모두 복잡함을 이겨내려는 시도로 얻어진 결과다. 이런 의미의 학문적 시도나 철학적 사고, 모두 일종의 단순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얽히고 설킨 세상의 원리를 심각하게 노려보고 그 원리를 깨닫거나,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듯 최선을 다해 그것을 이해하고 난 후에야 우리는 진정한 단순함을 얻는다.
복잡한 학문이나 이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 모두는 같은 과정을 경험한다. 우리가 처음 대하는 것은 모두 복잡해 보인다. 뉴욕의 맨하튼 거리에 처음 발을 디디게 된다면 우리는 그 복잡함에 어리둥절하게 될 것이다. 어디가 북쪽이고 어디가 남쪽인지도 모른 채 위 아래로 옆으로 다니다 보면 일종의 규칙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가 센츄럴 공원과 같은 기준점도 만들게 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맨하튼의 거리가 익숙해 진다. 지도를 보고 거리의 번호가 매겨지는 규칙을 이해한다면 더 빨리 맨하튼은 나에게 단순한 거리가 될 수 있다.
모르는 것은 복잡하고 아는 것은 단순해 보이며, 복잡한 것도 알고 나면 단순해진다. 학습이란 그래서 단순화하는 과정이며, 자연과학이던 사회과학이던 대부분의 학문 자체가 복잡한 세상을 단순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원리, 원칙, 법칙 그리고 이론이라는 것을 얻게 된다. 기본적으로 복잡한 세상을 날카로운 칼로 잘라보고 통찰의 눈으로 다시 재결합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복잡성은 우리들의 노력에 의해 그렇게 단순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의 정신 ‘프래그머티즘’ 즉 실용주의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한 올리버 웬들 홈즈는 “나는 복잡성 이전의 단순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지만, 복잡성을 넘어선 단순성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놓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일상을 살아간다. 일상이란 매일 그렇고 그런 생활이 반복되는 삶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면서 문제가 생긴다. 일상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사소한 것들을 대처할 수 있는 원칙이나 방법이 이미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을 뿐이다. 예를들어 처음 지하철을 타는 사람에게는 그 자체가 복잡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과학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All Life is Problem Solving)’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문제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현상이 나의 기대나 목표치와 차이가 있음을 의미하며, 그 차이의 간격이 클수록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거나 경험과 학습을 통해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에게 닥치는 문제가 단순하고 쉬운 것이 된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미리 경험하거나 배워둘 수도 없는 일이며, 우리에게 처음 닥치는 문제라고 해서 이 세상에 나타난 유일한 것일리도 없다. 지혜란 논의한 것처럼 한 분야에서 얻어진 지식을 여러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결국 참다운 지혜는 문제해결을 위한 체계적인 원칙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중 하나가 문제를 인식할 뿐 아니라 가능한 단순하게 정의하고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제서야 단순한 문제를 단순한 몇가지 원칙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미 지나간 시절에 어려웠던 문제를 떠올려 보라. 힘들고 복잡해 보이던 것들도 이제와 생각해 보면 간단한 실마리를 통해 해결되었거나, 아니면 단순한 방법을 놓쳐 실패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작정 사람을 믿었다거나 스스로 확인하는 단 하나의 과정을 놓치는 경우 등이 실패를 낳는다. 반면 멘토와 어려운 문제를 의논하는 과정에서 힌트를 얻거나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검토하면서 가장 상식적인 실수를 찾아내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우리들 뿐이 아니다. 세상의 위대한 문제해결사로 알려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문제가 모두 그렇게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나 자신과 이 세상을 이해하면서 단순한 원칙을 가지고 있을수록 우리가 만나는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시아의 정복자 칭기스칸은 늘 기동력을 자산으로 전쟁을 치루어 내며, 유럽의 정복자 나폴레옹도 언제나 기동력을 앞세워 단시간내에 적의 주력부대를 붕괴시키거나 마비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들에게 있어 전쟁의 원칙은 기동력이라 부를 만하다. 그 방법이 가장 우월하거나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확신하고 있었으며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얻어진 단순함은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솔직함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 첫째는 단순화된 것이 실제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매일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규칙을 알았다고 해서 태양에 대하여 모두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되었다는 것이 인간의 유전자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잡하게 보이던 것들의 일부가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단순화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그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태양이 매일 떠오르는 것은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기 때문이며, 그 운동의 원리는 중력으로 설명된다. 다시 중력이란 아인슈타인에 의해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는 설명이 나오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기다려야 했다. 여하튼 단순화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얽히고설킨 진실의 일부를 끄집어 냈을 뿐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완벽한 정답이 아니라, 우월한 해결책이다.
둘째로 부분이나마 이해하였다면 그것을 단순하게 설명할수록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물리학의 대가 파인만Richard P. Feynman은 그의 강의로 더 유명하다. 그의 강의를 담은 저서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는 지금도 전세계 물리학도의 필독서라고 한다. 그의 저서는 아마도 경제학에서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라는 책에 비유할만하다. 물리학의 파인만이나 경제학의 토드 부크홀츠Todd Buchholz는 그들 자신과 동료들이 얻어낸 성과를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전달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파인만은 칼텍의 1학년 대학생들에게 물리학을 강의하고 있는 학기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강의노트를 만들지 못했어. 1학년 학생들이 알아듣게끔 설명할 방법이 없더라고.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아직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야.”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자신 있게 알고 있는 것은 정말 간단하게 그리고 일상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역으로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매우 모호하게 말하거나 중언부언하기 마련이다. 우리를 속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그렇게 애매한 이야기를 복잡한 언어로 길게 늘어 놓는다.
그렇게 얻어지는 단순함이 자연의 법칙과 인생의 원리에 가까울수록 힘을 발휘하게 된다. 지혜라는 것 자체가 진리에 가까울수록 가치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인류와 함께 하면서 오늘 날까지 단순한 삶을 가능하게 해준 종교를 예로 들어볼 수 있다. 그들 종교가 진리를 포함하지 않았거나 자연의 법칙에 맞지 않는다면, 이제껏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비록 그들의 가르침은 오묘하고 복잡할지 몰라도, 결론은 그야말로 단순 명료하다. 기독교에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불교는 자비를 강조한다. 원리도 자연의 법칙과 잘 부합된다. 불교가 기초한 자연원리는 ‘인간은 고통스런 존재’라는 점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또한 우주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공간상으로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그렇다. 따라서 우리 모두 어떻게 될지 모르니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에서의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다. 그 원죄로 인해 남자는 평생을 노동을 해야 살아갈 수 있고,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안게 되었다. 인간은 그래도 계속 죄를 범하고, 하나님은 이를 벌하면서도 다시 용서한다.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두 종교가 보는 인생의 원리에 더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노력의 대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한다는 면에서 자연원리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유용한 지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에 반하여서는 결코 ‘지혜’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너 자신을 알라”와 “나와 남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와 같이 오래 전에 성현들에 의해 설파된 후 오늘날까지 인용되는 지혜들은 자연의 법칙에 기초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세상은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생존을 위한 마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과 주어진 환경의 조건이 맞지 않다면,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나와 남을 아는 일이 생존전략의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생각하고(Think), 어떻게 바라보며(See), 어떻게 행해야(Act) 할까?”라는 답은 각각 지기, 지피, 지피지기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능력에 맞게 생각하고 자연의 원리로 바라보며, 세상에 맞도록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