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셋째 날 제 2 교시: 사회학 시간 – 이기적인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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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크래쉬>라는 영화에는 여러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니 누가 주인공이라고 할 것도 없다. 비중 있는 배우들이 다양한 인종의 단역을 소화해내며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다. 미국 거기에다 LA라는 도시라 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영국계 유태인 극작가 이스라엘 장윌Israel Zangwill이 ‘용광로’(Melting Pot)라는 연극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리면서, 인종과 민족을 달리하는 이민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미국을 ‘인종의 용광로’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섞여 있되 함께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내용도 인종 간에 서로 충돌(Crash)하는 인종차별과 갈등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속의 수사관 그레이엄 워터스(돈 치들)는 이러한 현상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서로에 대한 느낌이 너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서로 충돌하게 되는 거야.”


사람이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남과 함께 하지 않으면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만만하지 않다. 오늘날의 생활은 이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너무나 불편한 것이 되었다. 아침 식탁에 오르는 대부분이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수고를 거친 것이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티베트의 양털에서 만든 울을 소재로 이태리의 디자이너에 의해 말레이시아의 한 공장에서 제조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 앞의 책상에는 만난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제조한 수많은 물건들이 놓여있다. 나 혼자 이 모든 것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면 평생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나는 내게 주어진 직업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을 누군가 지시한 것이 아니다. 에릭 바인하커의 말처럼 이런 경제를 움직이는데 일일이 챙겨주는 자비로운 독재자도 그리고 책임지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80억이 넘는 인구가 복잡하게 얽혀 살아가고 있는 복잡계에 가끔씩 발생하는 ‘경제공항’이라는 사고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도 잘 돌아가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담 스미스는 매일매일의 이런 기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이익추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산물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또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가운데서 사회나 국가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킨다.”


다시 말해 아담 스미스는 이런 기적 같은 일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다름 아닌 가격이다. 이 가격은 인간이 자기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경쟁과 협력을 선택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결과다. 얼핏 보기에 무한경쟁의 세계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는 듯 보인다. 인종과 국가, 나이, 성별의 차이 없이 이 경쟁 속에 참여하여 나의 아침 식탁은 물론 일상에 필요한 물건을 더 나은 조건으로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다. ‘보이지 않은 손’이 완벽하게 작동하려면 몇 가지 어려운 조건이 더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완전경쟁 시장이 되어야 한다. 경제학 교과서는 완전경쟁 시장이 되기 위해서는 다수의 기업, 상품의 동질성, 자유로운 진입과 탈퇴, 그리고 완전한 정보의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기업이 시장의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없을 정도로 한 시장에 무수한 기업이 존재하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완전경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시장에 많은 개인이나 기업이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 시장에 진입하고 퇴출하는 것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 환경이 된다면, 적정 이윤이상의 이익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작은 사업을 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이 필요하고 그 사업에 대한 정보가 요구된다. 돈 버는 방법을 눈치챘다고 해도 좀처럼 나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인간에게 저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면, 인간은 더 협력적이었을지 모른다. 오늘 생산한 물건을 오늘 사용하지 않으면 모두 사라지는 그런 세상 말이다. 은행에 저축예금이나 주식과 같이 내일을 위해 준비해두는 방법이 없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욕심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주식회사와 금융시장의 발전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발전을 이만큼 가져올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누구나 같은 조건으로 이 자본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간 기업은 독점이나 기업간 담합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분명히 불평등이 존재한다.


완전경쟁 시장의 또 하나의 조건은 정보가 한 시장의 참여자 모두에게 즉시 공평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시장이 과거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소위 돈이 되는 사업에 대한 정보는 소수에게 집중되어있다. 최소한 일정기간은 그렇다. 가격과 관련된 정보는 어떤 정보이든 즉시 모든 경쟁자가 동등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런 효율적인 시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보통신의 매개체의 발달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점차 완전한 경쟁시장이 되고는 있지만, ‘이기적인 유전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는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떤 사업이 돈이 되는지는 그 시장에 있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듯했다. 이익이 많이 나는 사업에 한 두 사람 더 참여하면서 그 이익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한동안 그 사업은 소수의 사람에게 독점된다는 말이다. 그런 행운이 찾아오기 위해서는 운이 좋게도 그런 사업에 친구나 친지 같은 지인이 존재하는 경우다. 그리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을 정보사회라고 해서 소수의 사람에게 독점되던 정보가 일반대중에게도 접근 가능한 것이 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특수한 정보는 아직도 소수의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다. 주식시장에서의 고급정보는 비밀리에 소수가 모여 교환되는 행태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완전한 시장이라고 볼 수 없다.


현실에서 시장은 이처럼 항상 불공정이 존재하고 있다. 완전경쟁 시장에서는 과도하게 이익을 보는 기업이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물건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과정은 그나마 어느 정도의 경쟁상태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분배하는 과정은 그렇게 효율적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시장경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빵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효율적이었으나 빵을 나누는 과정에서는 서투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늘날 부의 편중이 점점 심해진다는 사실을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손’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려면 그 밖에도 ‘멍청한 유전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게임의 룰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이익을 얻으려는 배신자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협력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또한 협력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끼리만 협력하는 이기적인 협력은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소위 집단적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사회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점점 좁아지고 있는 이 세상에 아직도 이기적인 협력에 의한 집단의 이기주의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실이다.


집단적 이기주의는 ‘이기적인 유전자’와 같이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중요한 현상 중 하나다. 1932년 출간되었으며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책 100권에 선정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사회내의 어느 집단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모한다” 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도덕적인 사람들도 그러니 이기적인 사람들만 모인 집단의 이기주의는 어떠할까 상상해 보라. 사실 인간의 역사는 이 집단적 이기주의가 만든 많은 비극을 포함하고 있다. 귀족과 양반이라는 특수계급은 그들만의 위한 많은 장치와 제도를 만들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도 이제 경제발전과 함께 조금씩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인도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특권계급은 자신들의 특수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늘 사회전체의 이익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눈 앞에 보이는 이익에 집착한다.

시대적 국가적 구별 없이 모든 정치적 집단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한 사회의 문화와 역사가 개인을 포로로 잡아 문화적 충돌을 야기하듯이 집단적 이기심이 각종 집단간에 사회적이며 정치적 충돌을 만들어 낸다.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은 종교와 도덕적 교육으로 어느 정도 억제가 되지만, 집단적 이기주의는 그런 방법으로 통제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집단간의 관계는 윤리적이기보다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에서 의견을 같이하는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개인의 입장보다 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으며, 목적을 같이 하는 집단은 혼자 행동하는 사람들보다 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명분이 충분한 평화적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해 그 의미를 퇴색시키는 경우도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소위 ‘불순분자’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그렇다. 아마도 위험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이란 것도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해 안달이 나있는 젊은이들의 집단적 이기주의를 자극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런 곳에는 언제나 그럴듯한 명분과 열광적인 선동이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공식적이던 비공식적이던 여러 모임이나 집단에 속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기업이나 단체의 조직도는 피라미드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관계를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그 모습은 인터넷의 네트워크와 닮았다. 아무리 조직에서 피라미드 형식의 관계를 만들어도, 명령라인을 벋어나 사람들은 관계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노드와 링크라는 말은 인터넷 용어다. 이 단어를 사용해 인간관계를 표현하면 노드는 사람 하나하나를 의미하며 링크는 노드들 즉 사람간의 관계를 말한다. 불교의 연기설(緣起說)도 인간의 관계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연기란 ‘말미암아(緣) 일어나는 것(起)’이란 뜻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은 독립적으로 홀로 생긴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질서하게 보이는 모든 복잡계는 수많은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복잡해 지는 것이고 또 복잡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20명 안팎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도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 네트워크는 어떨까?


언급하였듯이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는 반면 그 만큼 좁아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정말 좁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케빈 베이컨이라는 중견 영화배우가 있다. 그는 ‘어 퓨 굿 맨’, ‘리버 와일드’, ‘할로우 맨’, ‘아폴로 13’ 그리고 2007년에 상영된 ‘데스 센텐스’ 등에 출연한 조역 전문 배우다. 한 때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 바로 이 영화배우의 이름을 딴 <케빈 베이컨(Kevin Bacon)>이란 게임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게임 방식은 이렇다. 할리우드에서 아무 배우나 한 명 골라 그 배우가 출연한 영화에서 시작하여 함께 출연한 배우와 영화를 연결시켜 가면서 케빈 베이컨이 나오는 영화까지 가장 짧은 길을 찾아낸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우리가 각 주제를 유발하기 위해 참고한 영화에서 사례를 찾아보자. <레인맨>의 톰 크루즈는 케빈 베이컨과 <어 퓨 굿 맨A Few Good Man>에서 변호사와 검사 사이로 같이 출연했기 때문에 한 단계다. <포레스트 검프>의 톰 행크스도 케빈 베이컨과 <아폴로 13호>에 함께 나왔으니 그도 한 단계다.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클린트이스트우드는 메릴 스트립과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찍었고, 메릴 스트립은 케빈 베이컨과 <리버 와일드>에 출연했으니 클린트이스트우드는 2단계 만에 도달하게 된다. 반면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모건 프리먼은 이스트우드와 메릴스트립을 통해 케빈 베이컨과 연결됨으로 3단계가 된다. <구름 위의 산책>의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는 <체인 리액션>에서 모건 프리먼과 함께 연기한다. 따라서 키아누 리브스는 베이컨과 4단계 만에 연결되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가장 짧은 연결 단계를 찾는 것이 게임의 방식이다. 영화에 같이 출연한 관계를 1단계로 보았을 때 모든 할리우드 배우들은 평균 3.6단계 그리고 제 아무리 무명에 단역으로 출연한 배우라도 이런 식으로 여섯 번이면 반드시 케빈 베이컨과 연결이 되었다.


할리우드가 아니라 미국 전체를 따져보면 어떨까? 예상과는 달리 영화배우가 아닌 일반시민들의 경우에도 모르는 사람이 연결되는 단계는 6단계를 넘지 않았다. <케빈 베이컨 게임>이 유행하기 이전인 1967년 하버드 대학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편지전달 방식의 실험을 통해 미국사람들은 평균 5.5단계면 서로 링크된다고 보고하고 있다. 스탠리 밀그램은 300통의 편지를 미국 중부에 위치한 두 개 마을에 뿌리고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에게 “보스턴에 살고 있는 주식중개인 A씨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편지는 자기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보스턴의 A씨를 제일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전하기를 반복해 최종적으로 보스턴의 A씨에게 도착하도록 하는 것이다. 단, 편지 봉투에는 전달자의 이름을 적도록 해 편지가 전달된 경로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이 실험을 통해 성공적으로 배달된 편지에 적힌 사람의 수를 세어보니 평균이 5.5명으로 나왔다. 한국은 어떨까? 짐작하다시피 한국은 더 좁은 사회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안다고도 할 정도다. 2004년 중앙일보와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는 서울에 사는 특정한 사람을 ‘목표인물’로 정해 놓고, 도시에 사는 108명을 최초 출발자로 하여 그 목표인물을 연결해 보았다. 결과는 3.6단계로 나타났다. 3.6명만 거치면 한국인은 모두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국가간의 경계를 넘어서면 어떻게 될까? 특별한 경우이지만 미국의 영화배우 탐 크루즈와 안성기는 자신들이 출연한 영화 인맥을 통해 몇 단계 만에 연결되는지 상상해 보라. 탐 크루즈는 오우삼 감독과 <미션 임파서블2>을 함께 만들어 낸다. 그리고 오우삼 감독은 <영웅본색>에서 주윤발과 함께 작업하고 주윤발은 장쯔이와 <와호장룡>에 출연한다. 그리고 장쯔이는 <무사>에서 안성기와 함께 연기한다. 간단히 4단계 만에 연결된다. 그들의 실제 인맥을 동원한다면 아마도 단계는 더 줄어들 것이다. 여하튼 우리의 지구촌은 평균 6단계면 연결이 된다고 예상할 수 있다.


위의 게임과 실험들은 모두 이 세상이 작은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 네트워크가 평등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네트워크에서 조차 우리는 불평등을 발견한다. 우리가 발견하는 복잡계 네트워크의 불평등한 모습을 기억해 보라. 자연이 되었던 인간사회가 되었던 복잡한 네트워크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수의 주인공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내가 내 주변 특정인물과 주로 만난다면 나의 네트워크는 한정될 수 밖에 없다. 직업이나 나이 더 나아가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저 ‘좁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네트워크를 빌려야만 한다. 현실사회에서 좀더 넓은 네트워크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영향력을 가진다. 물류의 네트워크에서도 허브의 역할을 하는 공항이나 항구는 다른 곳에 비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며 그 만큼 커다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낸다. 인터넷에서의 허브라는 것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척도 없는 네트워크라고 부르는 복잡계의 모습이 그렇다.


인간의 네트워크를 인터넷의 검색엔진을 통해 수치화할 정도로 두 네트워크는 닮은 꼴이다. 기술적으로는 전세계 사람이 6단계 안에 연결될 수 있다고 해도, 그 연결의 강약은 모두 다르다. 인터넷의 웹사이트의 접속량과 트래픽이 모두 다르듯이 그렇다. 인터넷에 허브의 역할을 하는 사이트가 있다면, 인간관계에는 ‘마당발’이라는 인맥의 허브가 있다. 우리의 삶은 자기가 속해있는 네트워크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의해 인생의 대부분이 결정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집안과 학교를 통한 네트워크는 그야말로 운명적이다. 인적 네트워크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또 같은 네트워크에 속한다고 해도 연결하는 링크의 강약도 불평등하다. 사실은 인생에서 우연히 만난 한 사람이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경우가 수없이 많다. 현대 성공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나폴레온 힐 Napoleon Hill은 신출내기 기자 시절에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를 만난다. 나폴레온 힐이 성공 법칙을 연구하는 동안 성공한 사람들은 카네기의 소개라고 하면 그냥 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성공의 법칙을 찾아낸다. 외국으로 이민가는 사람의 직업은 공항으로 마중 나오는 사람의 직업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과의 만남이 운명을 결정하는 사례와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만남에 관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모두 멘토가 되었던, 스승이 되었던 아니면 존경하는 친구와 함께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로부터 조언과 지지를 얻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인간 네트워크를 함께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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