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은 제목처럼 주인공 제이콥(로빈 윌리엄스)의 거짓말로 많은 유태인들이 희망을 이어간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 내 유태인 마을 게토 지역에서는 라디오를 들을 수 없다. 라디오 소유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이기 때문이다. 팬케이크 가게를 운영하는 제이콥은 우연히 소련군이 폴란드 가까운 곳에서 독일군을 물리쳤다는 놀라운 소식을 독일군의 라디오를 통해 엿듣게 된다. 제이콥이 자신이 엿들은 기쁜 소식을 친구에게 전하자, 제이콥이 라디오를 가졌다는 추측과 함께 게토 지역 전체에 헛소문이 퍼져 나간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된 제이콥은 사람들이 자기의 거짓말에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그 거짓말을 멈출 수가 없게 된다. 거짓말은 점점 더 커지고 결국은 독일의 정치경찰 게슈타포의 귀에까지 들어가 제이콥은 고문을 받고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님을 인정하라는 강요를 받지만, 그는 사람들의 희망을 뺏을 수가 없다. 결국 제이콥은 거짓말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죽어간다. 피터 카소비츠 감독의 1999년 작품인 <제이콥의 거짓말>은 제이콥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우린 사소한 것에서 위안을 찾았지. 썰렁한 농담, 따사로운 햇빛, 희망적인 소문…”
<제이콥의 거짓말>에서 거짓말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제이콥의 말처럼 희망적인 소문에 게토지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아니 거짓말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보통 5세가 되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언어가 발달하고 상상력이 발달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것이 컴퓨터와 인간을 구별하는 놀라운 능력이며, 동물과 차별화되는 능력이기도 할 것이다. 동물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간혹 먹지 말라는 음식을 먹고서 안 먹은 척 시치미 떼는 동물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사자에게 쫓기는 영양이 한 쪽으로 달리는 척하다가 다른 쪽으로 방향을 돌려버리는 속임수를 쓴다. 까치는 자신의 둥지를 보호하기 위해 상대방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끌기도 한다. 하지만 동물의 능력은 거기 까지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상상하면서, 현재의 배고픔을 인내 한다든지 또는 있는 것을 없다고 가정하고 미래를 준비하지는 못한다. 거짓말은 인간에게 상상력이라는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대부분은 과거에는 마술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다. 눈으로 보여주지 않고 말로만 한다면, 거짓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더구나 ‘힘’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무선전화기로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과학을 모르는 옛날 사람들이 본다면, 무어라고 하겠는가? 거짓말이거나 마술이다. 그런 마술이 점차 인간에 의해 하나씩 과학이 되어왔다. 거짓말이 과학이 되는 과정에서 큰 공헌을 한 것 중 하나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거짓말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다는 것을 없는 ‘셈치기’가 그런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대상은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질을 보유하고 있다. 그것을 한번에 완전하게 인식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이럴 경우 우리의 선조 과학자들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이상적인 사물을 상상했다. 물리학에 등장하는 완전강체(完全剛體)나 완전흑체(完全黑體) 등이 그런 것이다. 완전강체는 외부의 힘이 중단되면 자신의 모양을 완전히 되찾는 물질이다. 완전흑체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상상 속의 물체다. 현실에는 이런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좀 더 쉬운 예로는 완벽한 정사각형이나 원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 또한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고, 만들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상상한다. 우리는 이런 이상적인 것으로부터 도출된 수학적인 공식이나 그 곳에 적용되는 법칙을 가지고 현실에 적용하여 사용한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지켜야 하지만 실제로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운동장의 면적을 구하거나 애드벌룬의 부피를 구할 때 우리는 완전한 직사각형이나 구에 적용되는 공식을 활용하여 해답을 구하고 그 근사치를 실제 면적이나 부피라고 받아들인다. 사실 이런 경우 크게 오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완전한 답이 아니라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자연과학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상상을 통해 완전한 이상의 나라를 만들어 현실의 나라와 비교한다. 주자학에서 이상의 나라는 이(理))이며 기(氣)는 현실의 세계다. 이런 모델 역시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생각을 단순화해주기 시작한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현실 세계의 문제점을 비쳐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순화된 세상을 학문에서는 가설이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존재하지 않지만, 하나 이상의 가정하에 존재할 수 있는 물질이나 세상이다. 경제학에도 이런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어 경제의 복잡한 현상을 이해한다. 완전경쟁시장과 효율적 시장 가설과 같은 것들이 그런 종류다. 완전경쟁시장이란 쉽게 표현하면 완전한 경쟁을 저해할 수 있는 장해요인이 전혀 없는 시장이다. 따라서 다수의 수요자와 공급자가 존재하고 완전한 정보가 주어진다는 가정 아래서 성립되는 세상이다. 효율적 시장이란 시장의 가격이 이용 가능한 정보를 충분히, 즉각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시장이다. 따라서 누구도 정보로 인해 추가 이익을 실현시킬 수 없다. 이런 가설에 의한 시장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이나 경제학 등의 사회과학 모두 이런 가설을 활용하여 세상을 단순화시키고 다시 그 곳에 포함된 가정을 검토함으로써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가정을 통해 사회나 자연현상을 단순화시키는 작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모형이나 모델은 사회과학의 이론을 정립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모델이란 원래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해 보려고 만들어진다. 복잡함 속에서 몇 가지 특징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강조하고자 하는 특징을 제외한 다른 것은 모두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하거나,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특징만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복잡한 시스템에서 하나의 변수만 제외하고 모두 제거해 버리면, 그 하나가 더 확실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건축의 모형도는 상대적 크기와 모양이라는 특징만을 강조한다. 다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자연과학자 그리고 사회과학자 모두 모두 복잡한 세계에서 ‘하나만 제외하고’ 나머지를 무시함으로써 더 큰 의미를 발견해 왔다. 무시한다는 것은 없다고 가정하거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도 만약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것을 몰랐다면, 아직도 그 이론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 다행히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뉴턴까지만 해도 ‘속도는 무한히 빨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운동에는 ‘가속도’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속도에 한계가 없다면 빛보다 빠른 물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1887년 미국의 두 과학자 앨버트 마이컬슨Albert Micfelson과 에드워드 몰리Edward Morley는 실험을 통해 ‘빛의 속도가 언제나 일정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다. 빛의 속도가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속도는 ‘거리÷시간’의 식으로 표시된다. 그런데 항상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빛을 이 식에 꼭 들어맞게 하려면 시간이나 거리(공간)가 함께 변해야 한다. 속도를 나타내는 공식의 분자에 있는 공간이 커진다면 분모에 있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큰 수로 변해야 ‘빛의 속도=거리÷시간’ 식에서 빛의 속도를 일정하게 만들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의 핵심은 이것이 전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절대시간’이나 ‘절대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특수상대성 이론의 핵심인 “모든 공간과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 물리량이다”라는 말은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빛의 속도가 고정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해석이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다행스럽게도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가정’이 아닌 ‘사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위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는 줄어들고, 운동하고 있는 시계가 정지하고 있는 시계보다 느리게 가야 한다. 시간의 상대성만 따로 표현하면 ‘움직이고 있는 물체에서의 1초와 정지하고 있는 물체에서의 1초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특수상대성의 핵심개념을 이해했다고 해도 이런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과장된 입장을 가정해 보면 이외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자. 초속 30만km로 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으로는 절대 그럴 수 없지만, 여하튼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자동차의 길이가 줄어든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다. 초고속 열차가 빛의 속도로 내 옆을 달려간다. 이럴 경우는 그 열차의 길이는 수축하여 0이 된다. 위의 말을 이해하였다면, “시속 300km로 달리는 고속철도는 1/100조 정도 줄어든다”는 말이 어느 정도 실감이 갈 수 있다. 계산하는 식이 그리 간단하게 도출되지는 않지만, 물체는 광속에 비례해서 수축한다는 것을 물리학자들은 쉽게 증명해 낸다. 단 현실에서의 변화가 정말 티끌 같은 정도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생활에서도 이런 현상을 관측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네비게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공위성은 초속 4km로 움직이고 있다. 이를 약간 복잡한 시간지연 식에 대입하여 계산해보면 하루에 약 7마이크로 초(1μs=100만분의 1초)씩 시간이 느려져야 한다. 중력까지 계산하면 다른 수치가 나오겠지만, 여하튼 GPS기기는 이런 시간 차이를 고려하여 우리에게 정보를 주고 있다. 아니면 아주 찰나의 순간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GPS는 매번 이미 달려온 길을 알려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가정을 통한 세상의 이해나 모델링은 자연과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제학의 전통이론은 물리학의 이런 방법론을 일찍이 받아들여 발전시켜왔다. 경제학의 수요와 공급이론은 가격과 판매량을 제외한 모든 변수가 고정되어 있다는 가정하에 만들어진다. 가정이나 하나 이상의 가정으로 구성된 가설을 이용하여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 학문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가정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여기저기서 훈련해 왔다. 미술이나 시를 배우면서 우리는 추상화를 배운다. 추상화란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특징을 제외한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루트번스타인은 “추상화는 보편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분야에서 추상화방법을 배우는 것은 다른 모든 분야에서 추상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추상화는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불필요한 부분을 도려내가며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의 단순화는 화가도, 작가도, 과학자도, 수학자도, 무용수도 모두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의식하지 않을 뿐이지 우리 모두 이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간에 다툼이 있을 때 간혹 ‘돈 문제는 차치하고’ 또는 “그 일은 별개로 하고”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이런 표현 자체가 거론하는 요소는 일단 없는 것으로 가정하자는 말이다. 그런 말 속에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하다. 여하튼 우리는 이런 가정법을 통해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또한 구체적인 가설을 세우지는 않지만 머릿속에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하며, 문제에 접근한다. 어떤 가능성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을 만들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매우 따분하고 지루한 일이 될 것이다. 그 가능성이라는 것이 가설이다. 필요 없는 것까지 모두 조사한 뒤에 이를 바탕으로 분석을 시작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 정보가 수집되거나 자료의 분석이 끝나면,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일단 초기가설을 세우는 것이 효율적인 업무의 한 방법이다. 복잡한 데이터나 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자. 아직 우리는 그 정보가 주는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있다. 이때 우리는 일부의 정보만 가지고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다소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예를 들어 역사학자가 한 고대왕국을 조사한다고 하자. 이 고대왕국의 문화와 생활을 알아내기 위해서 그는 많은 유물과 증거자료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찾아낸 몇 가지 단서만으로도 이 문화의 특징을 미리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단서를 찾아 다닌다면 목적 없이 헤매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탐색이 될 수도 있다. 가설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은 방대하고 복잡한 책을 읽을 때도 유용하다. 책의 제목과 일부를 살펴보고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나름대로 가설을 가져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가설은 저자와 대화를 해가는 도중에 수정해야 할 상황을 만나게 되지만. 여하튼 가설을 미리 생각해 보고 독서를 시작하는 것은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가끔 비관적인 상황이 벌어질 때도 있다. 제목과 내용을 대략 훑어보고 나름대로 “괜찮은 책이다”라는 가설을 세워 책을 구입했다고 하자. 하지만 막상 읽어가다 보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매우 실망스러운 내용을 만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므로 좋은 가설을 세우기 위해서는 경험과 전문성이 요구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능력은 선의의 거짓말과 같이 긍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생각의 방법이다. 가정이나 가설을 통한 세상의 단순화가 그런 것이다. 가설과 거짓말의 차이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밝히느냐 아니냐의 전제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가설을 통해 세상을 단순하게 만들고 또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재즈 음악의 대가 찰스 밍거스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쉽다. 하지만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만드는 데에는 창의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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