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막으려는 자는 어느 것도 막을 수 없다.
He who defends everything defends nothing.~ 프리드리히 2세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이 유럽 대륙을 거의 장악하고 있을 무렵 러시아가 프랑스와 벌이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에 나폴레옹이 등장하지만 그는 소설의 주인공도 영웅도 아니다. 톨스토이는 나폴레옹도 프랑스 대혁명을 이용해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이지 그 스스로 시대를 만든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전쟁과 평화>에서 톨스토이가 조명하는 장군은 자신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할 줄 아는 러시아의 쿠투조프(Kutuzov) 장군이다. 톨스토이가 러시아 사람이고 또 쿠투조프가 톨스토이 집안과 관계가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나폴레옹과 쿠투조프의 대결에서 쿠투조프가 승리한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전 유럽에 내린 대륙봉쇄령에 반기를 든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1812년 6월, 러시아를 침공한다. 상대방은 새롭게 총사령관이 된 쿠투조프다. 나폴레옹은 전진하면서 전투를 원했지만 러시아 군은 싸우기보다는 점점 더 물러서며 전투를 피하면서 전력을 유지했다. 단지 후퇴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군의 수중에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도록 식량과 가옥을 모조리 태워버리면서 때대로 기습공격으로 나폴레옹을 괴롭혔다.

그러던 쿠투조프기 마침내 1812년 9월, 모스크바 서쪽의 보로디노(Borodino)에서 대반격을 시도한다. 양군은 도합 10만의 사망자를 내는 격전을 치렀고, 쿠투조프는 더 이상의 희생을 포기하고 모스크바를 내주며 퇴각한다. 이 전투가 당시로는 인간의 역사에 기록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전투로 <전쟁과 평화>에 묘사된 보르디노 전투다. 이 전투에만 양쪽 20만 이상의 병력이 참전하여 프랑스군의 4분의 1, 러시아군의 절반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하는 사상자를 냈지만 밤이 되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 때 쿠투조프는 밤을 틈타 퇴각하고 나폴레옹에게 모스크바에 도달하는 길을 내주고 만다.
쿠투조프의 러시아군은 모스크바 도시의 시민들로 하여금 모두 도시 밖으로 나가게 하고 모스크바마저 포기해 버렸다. 쿠투조프의 퇴각으로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손에 넣었지만, 나폴레옹이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내려다본 황금빛 둥근 지붕이 번쩍이는 모스크바는 싸워야 할 적도 먹을 것도 없는 황폐한 도시였다. 모스크바는 러시아군의 초토화 전술로 인해 불에 타 텅 빈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니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화평을 청해올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의 제의 마저 묵살하고 만다. 때 마침 극심한 추위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스크바를 점령한 지 1달이 지나자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제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쿠투조프는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을 추격하면서 섬멸하기 시작했다. 1813년 쿠투조프는 죽었으나 러시아 군은 황제를 따라 끝까지 추격하여 1814년 파리에 입성하고 만다. 결국 러시아가 모스크바를 빼앗겼던 복수를 하고 최후의 승리를 들어 올린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 전쟁을 ‘조국전쟁’이라 부르며 쿠투조프를 아직도 조국의 영웅으로 기념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 옛날 이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착한 주인공은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They lived happy ever after)”라는 말로 끝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늘 욕심 많고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 같다. 눈에 더 잘 뜨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급 승용차일수록 불법 또는 엉터리 주차가 많을 것을 보면 그렇다. 정직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야비하고 탈법을 일삼는 사람들이 돈을 버는 데 있어서는 더 경쟁력이 있어 보인다.
사실 그런 사람들은 경쟁이라는 게임에 있어 반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전체 사회에 해가 되는 것임으로 사회 전체가 함께 방지하고 응징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의 논의를 벋어나는 것이다. 금도끼 은도끼가 등장하는 나무꾼 이야기 역시 정직한 사람에게 복을 내린다는 이야기다. 정직한 나무꾼은 금도끼 은도끼를 “제 것이 아닙니다” 라고 답을 한다. 하지만 정직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전략적으로 내 것이 아니라며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포기하기
경영학의 그루 피터 드러커는 선도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시장에서 그 선도기업을 내쫓고 후발기업 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제품 혹은 서비스가 10배 정도 더 훌륭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란체스터 법칙은 아예 자신보다 강하다면 경쟁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포기해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
등가교환의 법칙이나 트레이드오프의 법칙은 특별한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법칙이 아니다. 어느 것을 얻으려면 반드시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말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이며 결국 내 입장에서 보면 무엇인가 포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어떠한 전략을 사용하던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원칙은 피해갈 수 없다. 물론 전략이란 무엇을 얻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포기해야 할 것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전략을 세우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먼저 내가 포기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내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의 수를 믿고 정면대결을 할 때도 나의 희생은 피할 수 없다.
손자는 ‘병법은 기만전술’라고 한마디로 정의한다. 그래서 병법의 기본은 능력이 있으면서도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혹은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고 가까운 곳을 노리면서도 먼 곳을 지향하는 것처럼 하고, 혹은 먼 곳을 노리면서도 가까운 곳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기만술이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적에게 이익을 주어야 한다. 아니 최소 이익을 주는 것처럼 만들어야 한다.

삼십육계는 경서나 사서와 같이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현실에 적용하는 데 필요한 경쟁의 기술을 정리해 둔 것이다. 이 36계는 대부분 적을 속이는 것과 관련이 있는 전술로 구성되어 있다. 16계인 욕금고종(欲擒故縱)은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풀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패전계(敗戰計) 에 속한 6계 모두 나의 것을 포기하는 전술이다. 미인계(美人計)는 내가 아끼는 것을 적에게 내주는 것이다. 공성계(空城計) 는 나의 성을 가져다 바치는 것이며 적벽대전의 고육계는 내 살을 떼어 적에게 줌으로써 유인하는 전술이다.
적을 속이거나 유인하기 위해서라도 대가의 지급은 필수적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기 위해 이처럼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술과 전략이 아니라도 하나의 선택은 수많은 포기의 대가일 수 밖에 없다. 미국의 노장 골퍼 벤 그렌쇼우(Ben Crenshaw)가 공격적으로 골프 코스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전과 목표의 차이는 구체성 이외도 바로 이 대가를 ‘생각하느냐 아니냐’에도 존재한다. 목표를 위해 대가를 치른다는 것도 결국은 얻기 위하여 무엇인가 포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업을 위해서는 투자를 해야 한다. 즉 자기가 가진 돈을 포기하고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단순하기는 하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겠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 자체가 전략이다. 따라서 “나의 전략은 단지 열심히 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것이다.

포기하는 기술은 대안을 선택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경제학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을수록 우리의 효용이 더 커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간은 그 모든 선택을 비교 검토할 수 있을 정도로 합리적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너무 많은 대안이 있을 경우 오히려 의사결정에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많아진다. 의사결정에 있어서도 단순화는 중요한 덕목이다. 대안을 단순화한다는 것은, 아깝지만 비교적 중복되고 열등하다고 느끼는 대안을 포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상에서의 우리들도 직관적으로 많은 대안을 회피하려고 노력한다. 상품을 구매할 경우에도 2~3가지의 브랜드나 종류로 압축하는 일을 먼저 하게 된다. 선택권이 많을수록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종종 적은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는 것이 선택의 패러독스다.
무엇보다 선택이 많을수록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들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선택의 폭이 넓을수록 실수를 범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더구나 더 좋은 기회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도 클 수밖에 없다. 놓쳐버린 고기가 늘 더 커 보이기 때문이다. 포기해야 했던 대안에 대한 아쉬움이 큰 만큼 기회비용도 커진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우리 모두 복잡한 분석과 평가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결국은 단순한 몇 가지 변수로 압축하고 소수의 대안을 가지고 씨름할 수 밖에 없다. <블링크>의 말콤 글래드웰은 “탁월한 의사결정자들은 덜 중요한 98가지 요인을 직관적으로 차단하고, 정말 중요한 두 가지 요인에 초점을 맞출 줄 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의 욕심으로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늘 걸림돌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포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전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기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걸려든다. 사기뿐 아니라 일상에서의 대부분의 실패와 친한 사람과의 다툼도 모두 상식보다 큰 욕심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들의 능력이나 가지고 있는 자원에 한계가 늘 존재하기 때문에 욕심만큼 얻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진정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내가 먼저 무엇을 먼저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포기할 것을 찾아보라는 말이다. 이런 전략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유용한 전략이 된다. 예를 들어 작은 선물이라도 정성을 보태면 늘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며, 나의 시간과 편안함을 포기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주변에 언제라도 필요한 지지세력을 구축해 놓을 수 있다.
실행에 있어서도 포기하는 기술은 중요한 전략을 만들어 낸다. 손자병법은 다음과 같은 병법을 기록하고 있다. “내가 적보다 우세한 상황이면 적과 싸울 수 있지만(敵則能戰之), 내가 적보다 열세면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나고(少則能逃之), 내가 적과 적수가 되지 못하면 전투는 피해야 한다(不若則能避之).” 세상을 살다 보면 수많은 어려운 상황을 만난다. 이런 상황을 만나거나 예상되면 반드시 포기하는 대안을 고려해야 하지만 웬일인지 우리들은 쉽게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무리하게 계속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을 만날 수 있고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성공한 사람들에게만 시선을 집중한다.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던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성공의 법칙을 찾으려 노력하며, 성공한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포기하자 말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한다는 것이 실패라는 정서적 합의가 있는 탓인지, 누구도 쉽게 포기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포기한다는 것은 더 큰 어려움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세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자기자신이 이미 어려운 상태에 와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일하게 또는 무모하게 심지어는 게으르게 포기하기를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포기하는 것도 실행이다. 그리고 ‘포기하기’는 전략적 실행의 핵심이기도 하다. 하던 일을 포기한다고 해서 반드시 목표를 포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 또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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