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째 날 제 2 교시: 역사 시간 – 주도적인 선택과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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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영화 <선택 the Road Taken>은 세계 최장기수로 기네스북에 오른 김선명의 삶을 다룬 한국 영화다. 이 영화의 감독 홍기선은 “꿈 하나를 가지고 버틴 한 인간이 진실과 악수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꿈꾸던 세상과 그가 만나고자 하는 진실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더라도 “왜 꿈이 딱 하나야만 했을까?”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의 삶은 어떻게 보더라도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꿈과 진실을 스스로 찾아가는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100년전 쯤의 정치가인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의 말처럼 운명이란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 늘 선택의 문제가 된다.

영화 선택의 주인공 김선명은 1925년 경기도 양평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지만 6 25전쟁 당시 인민군 통치하에서 ‘공산주의는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사상’이라는 이념 교육을 받고 공산당이 되어 전쟁에 참전한다. 결국 유엔군에게 생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좌익 사상범으로 감옥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 때 그의 나이가 25세의 총각이었다. 45년이라는 교도소 생활에서 사상을 포기하는 전향서를 쓰도록 권유 받지만, 그는 자신이 양심이라고 믿는 가치를 선택한다. 아흔네살까지 자신을 기다리던 어머니를 45년 만에 만난 그는 두 달 뒤 어머니가 사망한 한을 가슴에 담고 2000년 비전향 장기수들과 함께 자신이 선택한 북으로 간다. 그때 그는 일흔 다섯의 총각노인이었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에 대한 선택과 점심을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하는 사사로운 것부터, 직업의 선택이나 배우자의 선택처럼 인생을 좌우하는 선택을 만나며 살아간다. 그런 선택에도 자율적인 선택과 강요된 선택이 있다. 우리에게 일상에서 주어지는 선택은 주로 자유로운 것이지만, 알게 모르게 강요된 선택에 의해 우리의 삶이 결정되기도 한다. 물론 그 강요된 선택 속에서도 우리의 선택을 달리할 수는 있다. 쉽지 않은 희생이 따르는 일이다. 강요된 선택 중에 하나는 사회가 받아들인 제도와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한 사회가 민주사회를 선택했느냐 아니면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그 구성원들의 삶은 달라지며, 한 나라가 선택한 종교가 국민들이 살아가는 양식까지 결정하기도 한다.


1961년 발표된 최인훈의 <광장>이라는 소설도 영화<선택>과 같이 전쟁포로를 소재로 하고 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많은 포로가 생기자 부산과 경북 등지에 분리 수용하던 포로들과 함께 거제도의 포로수용소에 집단으로 수용하게 된다. 13만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엔군 최대 규모의 시설이었다. 이 시설에 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여자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이 수용되기도 하였다. 이들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자동으로 자기가 속했던 곳으로 돌아갈 운명이었다. 1949년에 발의된 제네바협정은 “전쟁이 끝나면 전쟁포로는 지체 없이 석방되고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특별한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미국이 포로의 자유송환원칙에 의해 포로들에게 자유의사를 물어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송환하겠다는 의견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포로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북으로 돌아가거나, 자유대한민국에 남거나 제 3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포로들 중 76명은 자기 조국을 포기하고 중립국을 선택했다.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 역시 제 3국을 선택한 포로들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이명준은 인도로 가던 배에서 떨어져 자살하고 만다. 소설 <광장>은 여기 까지다. 하지만 MBC는 <76인의 포로들>이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로 이들을 추적한다. 그들은 현재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이민 1 세대’가 되어 그들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허구이기는 하지만 배우 이영애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제3국을 택한 76인의 포로 중 한 사람의 딸로 등장한다.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판문점을 찾는 스위스의 여 소령의 역할을 맡았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 읽은 책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만난 사람과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처음 대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세상을 보는 시각이 각기 달라진다. 자신의 가지고 있는 기존의 지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두 권의 책이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 주기는 하지만, 세상 전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선택>의 주인공 김선명이 지킨 양심 또는 신념은 그의 나이 25에 얻은 것이다. 이념이니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만 더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면 어땠을까? 자기와 반대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도 강경하다는 것을 인식했다면, 자신의 신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194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Andre Gide는 “사람이 바른 선택을 하려면 선택하려는 그 하나만을 볼 것이 아니라, 선택에서 제외되는 나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영화 <선택>에서 사회와 역사에 의해 강요된 선택과 그 조건하에서 개인의 선택한 결정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진화하는 과정을 선택의 연속이라고 본다면, 한번 잘못된 길을 선택하면 다시 옳은 길로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종의 역사의 포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과거에 얻어진 경험에 너무 집착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선택은 감성이 아닌 차가운 냉정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의 검프는 버스정류장에서 사람들에게 말한다. “엄마가 그러는데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은 거라셨어요. 어떤 것을 먹게 될지 모르니까요(Life was like a box of chocolate. You never know what you’re gonna get).”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삶을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보다 우리의 인생은 더 불확실하다. 한 박스 안의 초콜릿이 각각 다른 맛이라고 하지만 모두 달콤하다. 하지만 인생의 상자는 쓰고 고통스런 맛을 포함하고 있다. 선택이란 나와 상대방이 만났을 때 반드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결정과정이다. 무엇인가 간절히 가지고 싶을 때, 답답한 현실을 떠나 잠시 공상의 세계로 들어가면 거기에서는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어떤 것을 원하는 마음을 ‘욕구’라고 한다. 공상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욕구는 끝이 없다. 하지만 내가 남을 만났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 조건이 없는 현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구를 제한하는 조건은 지피와 지기를 함께 놓고 바라보면 늘 나타나는 현상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조건을 자원의 ‘희소성’에서 찾는다. 경제문제란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데 비해서 그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자원이 희소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이 희소성에서 나온다. 기업이 어느 물건을 생산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도 생산자원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쇼핑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이유도 우리가 가진 돈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산이 많은 사람도 선택해야 한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하다면 경제학에서는 그 재화를 희소하다고 말한다. 자원이나 돈이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자원도 무척 제한되어 있다. 아침에 잠을 더 잘지 아니면 일어날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도 시간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시간적 제한은 우리가 모든 경우를 다 살아볼 수 없도록 만든다.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하나의 선택은 다음의 선택에 대하여 또 제한조건이 되기도 한다. 지난 선택으로 인하여 나에게 주어진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선택하여야 할까? 다행히 이런 고민은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해오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과를 학문의 이름으로 준비해 두었다. 의사결정학, 심리학, 경제학 등이 그것이다. 원래부터 경제학은 선택의 학문이었지만 주로 경제문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경제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듯하다. 아마도 선택에 대한 계량적 판단이 명확한 곳이 경제문제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이 일상의 선택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직면하고 있는 선택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우리 일상과 가장 밀접한 학문인 것은 틀림없다.


경제학 교과서는 보통 다음의 간단한 세 개의 가정을 토대로 시작한다. 첫째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 둘째 자원은 유한하다. 셋째 우리의 무한한 욕구를 유한한 자원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한다. 하지만 미래의 불확실성은 우리에게 완벽한 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어에 ‘Proactive’라는 단어가 있다. 앞을 내다보고 행동하거나 미리 대책을 강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다. 이 단어가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중 첫 번째 습관이 되어,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는 의미의 ‘주도적이 되라(Be proactive)’가 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주도적이라는 것은 반동적(Reactive)이라는 말에 대응되는 말이다. 환경이 나에게 어떤 작용을 가해올 때 반응할 것이 아니라 미리 선택하여 행동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의 결정이 반동적일 경우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나 환경에 책임을 전가시킬 수 있지만, 나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선택은 이처럼 현재의 상황뿐 아니라 미래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선택이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이 단어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우연하게도 <스마트 초이스>의 저자들은 선택을 위한 생각의 방법을 Proact로 정리하고 있다. 즉 선택이란 문제(Problem)를 정의하고, 목표(Objective)를 설정하며, 대안(Alternatives)을 생각하고, 결과(Consequence)를 평가하여, 절충(Tradeoff)이라는 과정을 거쳐 얻어진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도 그랬듯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를 정리하는 것이 문제풀이의 반이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이야기 하면 잘못된 출발은 잘못된 의사결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잘 정리된 문제는 주어진 제한 조건과 목표로 구성되어 있다. 딸랑 목표 하나만 가지고 문제에 접근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주어진 현재 상황과 사용할 수 있는 자원 그리고 제한 조건들을 만족하면서 목표를 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조건을 파악하는 방법들을 위해 우리는 이미 정리하기, 축소하기, 압축하기, 분해하기 등과 같은 사고의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런 문제의 정의가 다름아닌 바로 ‘지피지기’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는 비전이나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말을 자주듣는다. 비전과 목표의 차이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목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비전은 본다는 말의 어원처럼 성공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목표는 그 성공을 향해 가야 할 곳에 눈에 잘 보이는 깃대를 세우는 것이다. 목표는 스마트(Smart)해야 한다. 스마트는 목표설정에 있어 지혜로워야 한다는 단어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하지만,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 좋아하는 맥킨지 컨설팅의 스마트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제안하는 스마트(SMART)는 Specific, Measurable, Action-oriented, Realistic, Time-limited의 약어다. 목표는 상세하고 측정 가능해야 하며, 행동지향적이고 현실적이며 또한 명확한 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어진 조건과 목표를 점차 구체적으로 정리해가면서 우리는 대안을 찾아낸다. 그렇다면 더 나은 대안을 찾는 원칙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우리의 직관을 믿는 것이다. 물론 평상시에 충분히 훈련해두었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이야기다. 일상에서 우리는 당면한 선택의 문제를 늘 분석적으로 대하지도 않지만, 또 항상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분석이란 것 자체가 일종의 비용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직관에 의해서, 그리고 경험에 의거하여 선택을 결정한다. 실제로 순간적인 결정, 즉 본능과 직관에 따른 선택이 종종 나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많은 부분을 경험과 훈련을 통해 무의식에 위임한 결과다. 말콤 글레드웰의 <블링크>가 직관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던 선택에 관한 원칙이 필요하며, 경제학은 그 원칙으로 한계분석을 제안하고 있다. 세상에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 또는 ‘All or Nothing’식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금 더’와 ‘조금 덜’의 선택에 직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곤한 날 아침에 ‘1시간 더 잘 것이냐 말 것이냐?’와 같은 선택이 일상에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한계(限界)라는 표현은 땅의 경계라는 말이며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땅 옆의 땅을 의미한다.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한계라는 말도 이와 큰 차이가 없다. 내 땅 옆의 땅에 농사를 더 지을 것이냐 아니냐의 선택이 한계적인 선택이다. 이때 우리는 현재 농사짓고 있는 것이 아닌, 추가되는 땅으로 인한 비용과 기대되는 이익만을 비교하여야 한다. 이것이 한계분석이다.


어느 휴일 날 회사 일을 해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가족들이 이에 불평을 하며 ‘가족이 중요하냐 아니면 일이 중요하냐?’고 따진다고 하자. 물론 대부분 가족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계분석에서는 전체로 보아서 가족과 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그야말로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상황에서 가족의 원래 가치와 일의 본래 가치를 비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고려할 것은 “이 휴일에 일을 함으로써 생기는 가치가 중요한가 아니면 가족과 함께 보내는 가치가 중요한가?”이다. 이것이 한계분석적 사고다. 따라서 만약 그 시점에서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이때 우리가 대답해야 할 정답은 ‘물론 가족이 더 중요하지만 이 시점에서 한계적으로는 일이 중요해’이다. 물론 우리 가족에게 한계라는 말을 먼저 이해시켜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늘 그렇게 선택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한계분석이란 결국 추가적인 비용과 이익을 비교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비용이고 무엇이 이익인가?”를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비용과 이익을 비교하는 사고의 툴을 경제학에서는 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라고 한다. 편익분석이란 간단하게 선택에 문제에 있어서 투자는 물론 선택으로 인한 손해와 이익을 검토하는 방법이다. 각종 토론회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한계적인 것 보다 본질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감정적인 싸움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이 다루어야 할 것은 한계적 비용과 수익만을 가지고 얻어진 편익분석적 결과물이어야 한다. 본질적인 문제들 대부분은 “사과가 맛있다” “바나나가 더 맛있다”와 같이 주관적인 가치인 만큼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대운하를 만드는 것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그로 인한 이익과 그 대가로 치뤄야 할 비용을 따져야 하는 일이다. 이런 문제도 늘 직관과 정답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의 불확실성과 위험의 정도에 대한 평가도 함께 해야 하며, 이익은 비교적 잘 보이는 반면 비용을 숨어있기 마련이다. 사실 선택에 있어 하나의 선택이 완벽하게 다른 대안에 비해 우월한 경우는 별로 없다. 만약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비교대상의 대안이 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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