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넥스트, 2007>의 주인공 크리스 존슨(니콜라스 케이지)는 라스베거스의 호텔에서 마술 쇼를 하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자신과 관련된 2분 뒤의 미래를 내다보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카지노의 총기를 든 강도 사건에서 그의 능력을 확신하게 된 FBI의 요원 캘리 페리스(줄리안 무어)는 LA에 핵폭탄이 설치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크리스 뿐이라고 판단한다. 그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FBI는 그에게 800만 인구를 위해 자유를 포기하라고 설득하고, 크리스 존슨은 개인이 가진 자유 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쫓고 쫓기는 상황이 벌어진다. 한마디로 <넥스트>는 FBI와 크리스, 그리고 테러리스트가 핵폭탄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두뇌게임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미래를 볼 수 있는 주인공 크리스는 마지막 장면에서 독백처럼 한 마디 한다.
“미래는 참 얄궂더군. 그걸 보는 순간 변하고 만다니까.”
영화 <넥스트>의 포스터에는 “미래를 2분 미리 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광고하고 있지만, 사실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보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미래가 아니다. <넥스트>의 주인공 크리스의 말처럼, 미래를 본 순간 미래는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최소한 물리학의 한 분야인 양자역학에 의하면 그렇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가 설명하는 것처럼 사람의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우리는 관찰대상에 비추어진 빛이 반사되어 우리 눈으로 되돌아오는 원리에 의해 물체를 인식한다. 빛도 알갱이다. 이 입자가 인식하려는 대상에 부딪히면 정말 작지만 그 대상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양자역학에서 이야기하는 전자 정도의 크기라면 그 영향이 변화를 만들기에 충분한 정도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정확한 물리법칙이라도 미래를 오차 없이 정확하게 예측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의 확률뿐이다. 영화 <넥스트>의 주인공은 미래를 보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허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도 간혹 “실수한다”는 것을 인정한다(Something’s wrong! I made a mistake). 미래를 보는 주인공 크리스에게도 미래는 확률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치 앞도 못 보는 우리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세상은 이처럼 복잡하면서 모호함까지 내포하고 있다. 선조들의 빛나는 노력 덕분에 우리는 복잡한 세상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다. 우주의 움직임, 자연의 법칙, 역사의 흐름 그리고 경제적 현상까지 과거와 오늘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론적으로 상당한 진전을 이룬 경제학도 미래를 전망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엄청난 자연과학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기상을 예측하는 데 번번히 실수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만나는 불확실성이라는 모호함은 대부분 시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실 현재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미래의 불확실성까지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다. 단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확률로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수 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돈에 가까운 복잡성에서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확정적이지 못하다.
디지털은 연속적인 수가 아닌, 특정한 이산적(離散的)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산적이란 연속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들의 컴퓨터는 모든 자료를 0과 1의 조합으로 생성하고 처리하고 저장한다. 정확하게는 디지털 신호는 전류가 흐르는 상태(1)와 흐르지 않는 상태(0)의 두 가지를 조합하여 전달하게 된다. 모든 정보를 단 두 가지의 조합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견(一見) 불가능해 보이지만,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와 숫자, 기호 등을 디지털 형태로 사용하는 데에는 8개의 비트만 있으면 충분하다. 2진수의 0과 1, 이 두 가지 상태가 1비트를 의미하므로 8개의 비트를 묶어서 사용하면 모두 256(2^8=256)개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즉 0000 0000부터 1111 1111까지 256개의 조합을 이용해 모든 인간 문자와 숫자를 표현하게 된다는 뜻이다. 만약 64 비트 컴퓨터라면 2를 64 번 계속 곱한 숫자인 무려 1,844 경 가지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컴퓨터가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된다.
반면 자연이 보내는 신호는 모두 아날로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연속적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사람 목소리나 악기는 연속적인 파형이다. 이것을 디지털로 전환하려면 정말 잘게 잘라내야 한다. 아날로그의 사진은 전체가 한 장이지만, 디지털 사진기로 찍은 사진은 여러 개의 퍼즐 같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연속적인 현실세계를 디지털화하려면 조각조각 나누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다. 엄청나게 빨라진 컴퓨터 덕분에 가능해진 일이다. 언급하였듯이 컴퓨터는 자료 생성만 ‘0’과 ‘1’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0’과 ‘1’로 한다. 컴퓨터의 생각하는 기본적인 논리는 아니오(0)와 예(1)로 이루어 져있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는 아니오 와 예로만 답할 수 없다. 세상은 ‘그것도 맞고 그럴 수도 있는’ 현상들로 가득 차 있다. 시간에 의한 불확실성까지 고려한다면, 대부분의 답은 오히려 0과 1 사이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처럼 오늘은 좋은 일이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아니오 와 예라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답을 하는 반면, 우리는 늘 상대적으로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해 ‘0’과 ‘1’사이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자연은 아날로그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것이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0’과 ‘1’사이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0’과 ‘1’사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더 나은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날로그는 연속적인 신호인 반면 디지털은 비연속적이며 절대적이다. 이론적으로 연속적인 것이 더 실제를 더 잘 표현할 수 있겠지만, 현실의 아날로그는 모호함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아날로그 시계를 생각해 보자. 시계의 바늘 자체가 몇 분 몇 초까지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도 않지만, 우리의 감각에도 오차가 있을 수 있다. 반면 전자시계는 불연속적으로 시간을 표시하지만, 늘 정확한 수치를 제공해 준다. 그것이 “맞다 틀리다”는 다른 이야기다. 실제로 디지털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연속적인 값을 표현하기에는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전류가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반면 전류가 흐르고 또는 흐르지 않는 두 상태로 모든 상황을 나타내면, 아니오(0)와 예(1)라는 절대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연속성이라는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기록, 전송, 수신, 재생 등의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아날로그에는 오류가 자주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마찬 가지로 ‘0’과 ‘1’사이를 생각한다는 것이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우리가 대하는 세상이 모호할 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라는 능력이 가지는 한계가 거기까지 이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도움을 얻어 기존의 ‘0’과 ‘1’사이에 하나의 위치를 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곳에도 간격이 좁아 지기는 했지만 다시 새로운 ‘0’과 ‘1’이라는 비연속적인 두 개의 점이 생길 뿐이다. 예를 들어 남자의 평균신장이 175cm라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174.9cm의 키를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면, 이 사람은 키는 작은 것인가 아니면 평균키는 된다고 보아야 하는가? 컴퓨터는 바로 작다고 대답하겠지만,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다를 수 있다. 모호한 세상의 정보를 ‘0’과 ‘1’로 분류하고 또 ‘0’과 ‘1’로 생각하라고 컴퓨터에 명령한 것도 우리들이다. 따라서 컴퓨터가 제공한 하나의 점이 정답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수학적으로는 정확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문제를 완벽하게 수치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결국은 우리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0’과 ‘1’사이의 어딘 가에 정답이 있을 수도 그리고 없을 지도 모르지만, 한 점을 집어낼 수밖에 없다. 컴퓨터와 같은 수단을 제공하는 학문 이외도 많은 과학이 좀 더 정확한 ‘0’과 ‘1’을 찾아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연과학은 비교적 작은 범위의 확률로 그 간격을 좁혀 놓았다. 우리는 쉽게 그 오차 범위 내에서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회과학이 얻어낸 ‘0’과 ‘1’의 간격은 그 사이에서도 실패와 성공이 교차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이 대부분이다. 학문의 목적은 최선의 답을 찾는 것이며 과학자들은 늘 정확도를 추구하고 있지만, 학문의 세계는 수많은 가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과학자들이 제공하는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정답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정확도를 포기하면서 주어진 ‘0’과 ‘1’사이의 어딘가를 선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완벽하거나 완전한 진실에 접근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도 정확도를 포기하면서 이 세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기업가들은 완벽함을 양보하였기 때문에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뉴턴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발견할 때까지 그의 운동법칙을 붙잡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라.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이 너무 커서 오늘날의 컴퓨터의 크기로 작아 질 때까지 연구만 하고 있었다면,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는 아직 그 문도 열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의 창업자 정주영이 울산에 조선소를 완성할 때까지 수주를 안 했다면, 오늘날의 현대중공업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후발주자로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터넷 기업들에게 있어 완벽함은 더 위험한 장애요소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성공한 인터넷 기업들은 그 수익모델도 분명하지 않은 채 시작된 것들이다.
학자들의 연구나 세상의 선배들이 알려주는 지혜는 우리의 삶에 큰 힘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정답이 되지는 못한다. <혼돈으로부터 질서>의 저자 프리고진은 “더 이상 과학이 확실성을 의미할 필요도 없고, 확률이 무지를 뜻하지도 않는 새로운 합리주의가 출현하고 있다“면서 과학조차 모호성을 인정해야 함을 강조했다. 더구나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우연’이라는 현상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연구의 조건과 선배들이 살았던 상황이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작은 차이라도 존재한다면 미세한 조정이라도 거쳐야 한다. 학문이 디지털이라면 현실은 아날로그다. 경제학의 모든 이론에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바로 경제정책의 전문가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물리학의 대가라고 해서 모두 발명품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현실의 세계와 만나 대화하는 과정을 겪어가면서, 우리는 미세 조정하는 방법을 배운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못하며, 하나의 정답으로 정리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0’과 ‘1’사이에서 확률적으로 하나의 점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려고 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우월한 답’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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