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워 오브 원(The Power of One, 1992)>의 주인공 피케이(PK, 스티븐 도프)는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절,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다. 아프리카에 사는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인을 지칭하는 아프리카너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권을 장악하고 분리주의를 내세우던 1948년이 이 영화의 배경이다. 피케이(PK)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지만, 유모의 이끌림에 의해 줄루족 주술사에게서 두려움을 떨치는 용기를 얻고, 지혜로운 흑인 피트를 통해 권투와 전략을 배운다. 인종간 국가간 그리고 종족간 갈등이 심하던 시절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피부색에 매이지 않는 편견 없는 세상과 ‘한 방울의 물이 모이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힘(The Power Of One)’이 된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피케이의 또 하나 위대한 스승이자 유일한 친구인 독일인 교수 닥으로부터 자연을 통해 세상을 지혜롭게 바라보는 시각도 배운다. 닥은 어린 피케이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됨을 가르친다.
“자연은 모두 서로 협동한단다. 해가 없으면 달빛도 없지. 둘이 합쳐야 달빛이 생겨”
협력하는 사회가 발전하고 협동하는 조직이 강하다는 것을 모두 안다. 사회나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다. 상호적인 이타적 행위는 신뢰가 전제된다면 쌍방이 이득을 보는 전략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는 다르게 상대방의 보상이 전제되지 않는 순수한 이타적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기적인 유전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순수한 이타적 행위는 행위자에게 손해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결코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처럼 이타적인 행위는 자연원리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도덕성을 강조해 왔다. 공자는 인(仁)과 예(禮)를 가르쳤고, 맹자는 여기에 의(義)를 더하여 사람들을 교육하였다. 인은 다름아닌 도덕성이다. 이 도덕성이 외면적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 예이다. 그런 예가 모이면 의가 되고, 의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사회적 정의가 된다. 공자에 있어 인(仁)은 사람이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 말은 이상적인 사회를 가정하고 그것에 맞추어 인간성을 정의한 후에 우리보고 인간의 실제 본능을 극복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의 주장이 인간의 본성과 괴리가 있을 때, 개인의 입장에서 실천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들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사회도 이루어 낼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도덕을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자기 자신이 도덕적인 사람은 만나기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도덕적이고 이타적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 라인홀드 니버는 사회의 차원에서 인간의 도덕적 혹은 종교적 이상의 완전한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인간의 본성 때문에 자발적으로 이타적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언급하였듯이 자연과학이던 사회과학이던 과학분야의 학자들은 이타적인 행동을 이기적인 인간의 입장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이타적 유전자>의 저자인 매트 리들리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도킨스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이기적 유전자’ 안에서 적자생존이 아닌 이타주의를 읽어 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유전자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것보다 ‘다른 개체들과 협동’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협동 역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타인을 돕는 그런 헌신적인 이타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기적 유전자들이 선택한 생존 전략일 뿐이다. 진화경제학자 최정규는 <이타적 인간의 출현>에서는 게임이론을 통해 일종의 과시를 위해 이타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부자들이 종종 하는 거액의 기부금 같은 것이 그런 종류일 것이다. 또는 자신의 집단에서 인정받기 위한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타나는 이타적 행동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높은 도덕성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밖에 없다. 스티븐 코비가 말한 “도덕적 권위를 획득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주장도 결국 나의 이기심에서 생겨나는 지도 모른다. 도덕적 권위를 가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함께 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런 의미라면 이타심은 무엇보다 전략적으로도 소중한 것이 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여전히 순수하게 이타적인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이야기를 접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모든 인종에게서 발견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약 3만개 유전자 중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현재 5000개 정도라고 한다.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기능과 역할이 어느 정도 알려졌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서 언어를 담당하는 유전자는 FOXP2다. 만약 우리에게 ‘이타성’이라는 유전자 또는 유전자들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가 이야기하는 ‘양심’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루이스에게 양심이란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으로,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며 자연법이다. 이런 의미의 양심은 맹자가 강조한 인간의 본성인 사단(四端)에 상응된다. 사단이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가지 인성으로,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착한 본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맹자는 이런 인간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지금 사람이 문득 어린아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있을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한 것이 아니며, 마을사람들(鄕黨)과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 비난하는 소리가 싫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런 양심이란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인간의 이타적인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유전자가 보고 되기도 했다. AVPR1a라고 부르는 유전자다. 이스라엘 히부루대학의 연구팀이 과학저널 <유전자, 뇌 행동, Genes, Brain and Behavior, 2008. 4>에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AVPR1a라고 부르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기부를 더 많이 한다. AVPR1a 유전자는 아르기닌-바소프레신(arginine vasopressin)이라는 호르몬이 뇌 세포에 작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신경전달물질의 하나인 이 바소프레신이 이타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팀의 책임자 아리엘 크나포Knafo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가 DNA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첫 증거”라고 말한다. 아직은 첫 증거이니만큼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인간의 이타성이 인간의 본성 중 하나라고 추론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희생적인 사람들이 출연하는 영화나 소설에 감동한다. 그런 감동은 억지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이익을 던져버리는 사람을 성인 또는 영웅으로 간주해 왔다. 나는 못하지만, 그런 사람이 존경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고 그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머금는 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그런 본성이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만족>의 저자 그레고리 번스Gregory Berns는 사람이 서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도우면 뇌가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이타적인 태도를 보일 때 사람의 뇌에서 즐거움을 유발시키는 신경조직이 최고조로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쾌락의 물질이라고 부르는 도파민 덕분이다. 도파민이 뇌 속에 방출됨으로써 우리는 쾌감을 느끼고 의욕을 갖게 된다.
이타적인 행동이 인간에게 이처럼 즐거움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왜 순수한 희생정신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까? 아마도 인간의 욕구단계와 관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 잘 알다시피 매슬로의 5단계 욕구는 기본적으로 생존, 관계 그리고 성장욕구라는 3단계로 단순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매슬로의 말대로 기본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의 욕구를 갈망하게 된다. 기본 욕구인 생존욕구를 위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방식이라도 행동에 옮긴다. 살아 남기 위해서다. 그런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하고 나서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함께 하고자 하는 욕구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부지런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는 하다. 반면 성장을 위한 욕구는 더 많은 노력과 땀을 요구한다. 쉽게 이루어 지는 일이 아니다. 고생 끝에 얻은 성취감의 만족은 크지만, 장시간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오랫동안 공들였던 일이 마무리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 곳에서 오는 쾌감은 순간적인 쾌감에 비해 말할 수 없이 더 큰 것이지만 누구나 도전하지는 않는다.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우리의 뇌는 ‘즐거움의 원칙’에 따라 활동한다. 기분 좋은 행위를 자주 하게 되고 불쾌한 일은 기피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과거에 즐겁지 않은 일을 한 후에 만족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초기의 고통을 감수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시련이나 고통 뒤에 이어지는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 힘들고 싫은 일에도 도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몸을 만드는 운동의 고생과 창작을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아니 ‘노동의 재미’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지도 모른다. 나이 든 분들이 별로 얻을 것도 없는 농사를 짓기 위해 도시의 자투리 땅에 나가 땀을 흘리는 것을 보면 그렇다. 비록 하는 일이 어렵고 힘들지만 나중의 큰 성취감이나 만족감이라는 쾌감을 위해 기꺼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남을 돕고 나를 희생하는 일은 당장 나에게 고통스런 일이다. 하지만, 한번 그런 행동에서 만족을 느끼면 다시 반복하고 싶어진다. 사실은 이 말을 하기 위해 먼 곳을 돌아왔다. 이타적인 행동은 우리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본능적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누구라도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한 후 일종의 뿌듯함 같은 만족을 누구라도 느껴 보았음직하다. 단지 그런 본성이 발현되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성장을 위해 필요한 노력과도 마찬가지로 달성하고 나면 더 큰 만족을 경험할 수 있지만,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고는 그 즐거움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타성이 우리의 본성이라면 이제 아이들에게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위대한 일이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와 배려가 자신의 인생을 즐겁게 하는 일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선진국일수록 기부행위와 자선활동이 더 활성화되어 있다. 미국에는 크고 작은 자선단체 수가 무려 6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연봉 3만 달러 수준의 직장인은 매년 1천 달러 이상을 기부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세계적인 부자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2006년 6월 그들의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고 또 실행하고 있다. 그들이 대주주로 있고 경영하는 기업의 재산이 아니라 개인의 돈을 사회에 내놓은 것이다. 우리나라도 점차 많은 사람들이 기부문화에 동참하고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 중에는 남에게 내세우기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신의 만족을 위해 기꺼이 나서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익명의 기부자들이 제법 있다는 것이 그런 사실을 증명한다. 봉사와 기부는 우리 인간의 이타적인 정신이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성경은 남을 위해 일할 때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봉사와 자선이란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손이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작지만 보이지 않는 많은 손이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 증거를 우리는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 내는 ‘보이지 않는 손’을 찾아낸 아담 스미스는 일찍이 이타심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가능성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도덕 감정론>의 첫 구절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어떤 원리(연민과 동정)들이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들의 행복을 보는 것 말고는 얻는 게 없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빌 게이츠는 2008년 스위스의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창조적 자본주의에 관한 발언을 했다. 그가 하버드 대 졸업식에서 가진 연설에서 최초로 언급한 창조적 자본주의란 자본주의의 양대 축인 ‘시장’과 ‘기술혁신’을 활용하여 21세기 최대의 고민인 가난과 질병으로 인한 인류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우연하게도 빌 게이츠 역시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 앞서 쓴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은 타인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존재라고 규정한 대목을 읽고 ‘창조적 자본주의론’을 착상했다고 한다. 미국의 언론 월 스트리트 저널이 보도한 내용이다. <국부론>에 이기심에서 만들어지는 가격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도덕 감정론>에는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타심이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상은 이 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좀더 완벽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일로 돌아가 보자. 세상을 움직이는 이타적인 ‘보이지 않는 손’을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연민의 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적합한 단어는 영어의 컴패션(Compassion)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컴패션에 해당하는 우리 말을 찾기가 그리 녹녹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동정’이라고 번역되지만 어쩐지 상대방을 낮추어 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연민이라고 옮겨 보아도 또는 불쌍하다는 의미를 가진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떠올려 보아도 적당해 보이지 않는다. 컴패션이라는 말에는 연민과 동정의 뜻 말고도 ‘고통’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열정은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열정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패션(Passion)이라는 말에도 고통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따라서 컴패션이란 말은 ‘함께하는 고통’이라는 뜻을 내포하게 된다. 컴패션이란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이해하는 데서 울어 나오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열정은 우리가 이 세상을 만나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 자세가 일을 성공으로 이끌어 낼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성취감도 클 수밖에 없다. 밋밋한 마음으로 그리고 억지로 실행하는 곳에서 즐거움을 얻어낼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우연히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리 큰 만족감을 맛볼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개인의 열정이 ‘패션(passion)’이라면, 상대방의 열정과 함께하는 일은 ‘컴패션(Compassion)’이다. 한 사람의 성공여부는 거의 개인의 열정에 달려있지만, 성공하는 사회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열정 즉 동정이 만들어 낸다. 한 인간의 행복을 위해 모두 필요한 조건이다. 성공했다고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보고 웃어 보았자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의 해와 달이 합쳐 달빛을 만들어 내듯 인간의 이기심이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과 동정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이 마주하며 우리의 세상을 살고 싶은 사회로 만들어 간다. 그런 사회에는 고통을 잊기 위해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던 아니면 성공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사람과의 만남이 기다려져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그런 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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