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셋째 날 제 1 교시: 도덕 시간 – 이기적 유전자와 멍청한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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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산책, A Walk in the Clouds, 1995>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폴 서튼(키아누 리브스)은 외롭게 자란 고아다. 3년을 전쟁터에서 보낸 폴이 초콜릿 상인이 되어 길을 떠났다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빅토리아를 만난다. 빅토리아는 유학 중 미혼모가 되었고 엄격한 아버지를 두려워한 나머지 집에 돌아가지 못하던 처지였다. 폴은 그녀를 돕기로 하고 그녀의 가족이 살아가고 있는 포도농장으로 향한다. 그 농장의 이름이 라스 누베스(Las Nubes), 즉 구름이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빅토리아의 아버지는 집안의 허락 없이 결혼한 딸을 냉정히 대하고 폴은 빅토리아를 불쌍하게 여긴 나머지 하루하루 떠날 날짜를 미루게 된다. 그러면서 폴은 다른 식구들에게 서서히 가족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빅토리아 아버지의 실수로 농장의 포도밭이 모두 타버리고 말자 농장의 식구들은 망연자실하고 만다. 이때 폴은 빅토리아의 조상들이 가져온 포도나무의 자손들이 간직된 곳에서 속이 타지 않은 포도나무를 발견하게 되고, 가족들은 다시 희망을 품는다. 빅토리아의 아버지 아르곤은 폴에게 결혼을 허락한다. 화염 속에서 살아남은 포도나무의 뿌리를 폴에게 심도록 하면서 폴에게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말도 함께 해준다.

“이것이 자네의 뿌리고 자네 가족의 뿌리라네. 자네는 이 포도나무 뿌리를 통해 땅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 가족과 연결되었지. 심어보게. 잘 자랄 거야. This is the root of your life, the root of your family. You are bound to this land and to this family. Plant it. It will grow”


폴이 포도나무의 인연으로 가족을 만나고 자연을 통해 삶을 만나듯, 우리 모두는 또 다른 모두와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다. 그 형태는 복잡계라고 하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다. 경쟁과 협동 그리고 만남과 헤어짐으로 매번 다른 모습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지만, 그렇다고 전혀 엉뚱한 모습은 아니다. 혼돈과 변화 속에도 일정한 규칙과 원리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바라보면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냥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먹이를 위한 경쟁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다. 거기다 다른 포식자의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온 자연을 관장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곳에도 협동과 협력 그리고 공존의 원칙이 존재하고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비사회적인 행위에 대한 징계가 집행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만 그런 정글에 화해도 존재한다. 먹이와 번식 상대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늘 경쟁만 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의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돕고 사는 관계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은 동물들은 떼를 이루어 다녀 더 크고 위협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포식자에게 덜 잡아 먹힌다. 하이에나는 사자에 비해 덩치도 작고 힘이 약하지만, 사자보다 무리의 숫자도 많고 잘 뭉치기 때문에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 많은 동물들이 서로 핥아주기도 하며 협동한다. 흡혈박쥐가 서로 먹이를 공유하고, 남극의 펭귄과 같은 많은 새들이 집단을 위해 다른 새의 새끼를 돌보는 사례가 알려져 있다. 동물학자 제인 구달Jane Goodall은 탄자니아에서 고아가 된 아기 침팬지를 떠맡아 기르는 침팬지 집단을 자주 목격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런 자연과 동물이 상호의존하며 살아가는 행동이 유전적 본능인지 아니면 상황의 판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인간도 매우 이기적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도 정글만큼이나 경쟁을 요구한다.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성취하기 위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저자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인간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 유전자의 목적은 자신의 복제를 가능한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보존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유전자가 조정하고 있는 셈이다. 살아있는 가장 작은 단위는 세포다. 우리의 몸도 세포로 이루어 져있다. 그런데 그들 세포도 아니고, 세포 안의 핵에 들어 있는 염색체도 아니고, 염색체를 구성하고 있는 DNA도 아니고 그 DNA를 구성하고 있는 30억 개의 염기 중 극히 일부인 약 3만개의 유전자가 우리를 꼭두각시처럼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기적 유전자의 가설로 인간행태의 많은 것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다.


위험에 처한 자식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어머니의 사랑도, 가족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도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많이 가진 생명체를 도움으로써 유전자를 후손에 남기려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미 예로 들었듯이, 남성이 바람을 많이 피우는 것도 가능한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를 많이 복사하기 위한 자연적인 현상일 지도 모른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암수 어느 개체에서나 그 생애에 있어 번식의 전체 성적을 최대화하는 것을 바란다. 정자와 난자의 크기 및 수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수컷에게는 일반적으로 난혼과 자식 보호의 결여 경향이 보인다. 이에 대항하는 대책으로서 암컷에게는 두 가지 대표적인 전략을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남성다운 수컷을 뽑는 전략이고, 또 하나는 가정의 행복을 우선하는 수컷을 뽑는 전략이다”라고 설명한다. 데이비드 버스가 <욕망의 진화>에서 하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도킨스는 더 나아가 인간을 유전자의 의지대로 유전자의 번식을 위해 먹고 일하고 사랑하는 존재로 해석한다.


일면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기적 유전자로 세상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는 많은 효자 효녀들이 존재한다. 특히 동양에는 효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다. 자식들은 이미 부모에게서 ‘이기적인 유전자’를 모두 받은 상태다. 그들에게 다시 거슬러 올라가 유전자를 증식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들은 어머니라는 말에도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라는 단어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이기적인 유전자’로는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기적 유전자>의 내용이 리차드 도킨스 자신의 연구로 얻어진 결과도 아니다. 많은 진화학자들의 성과와 이론을 재조합 하여 얻어낸 주장이다. 도킨스가 말하는 ‘인간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서 맹목적으로 프로그램 된 로봇 기계’라는 말도 사회생물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 낸 에드워드 윌슨이 1978년 발행한 <인간본성에 대하여>에 나오는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개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것이 창조이기는 하지만 도킨스의 주장이 검증된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이기적인 점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관찰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반면 협동하는 현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협동자체도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이타적인 행동 또한 이기적인 계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협동심을 키워왔던 것은 사냥을 하거나 농사를 지을 때 서로 돕지 않으면 생존에 불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회학자들도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이 사회적 필요성의 산물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기적 유전자>를 비판하기 위해 쓰여진 듯한 <이타적 유전자>의 저자 매트 리들리Matt Ridley도 인간의 협력을 이기적인 상호주의에서 찾기는 마찬가지다. 리들리는 우리의 신체를 예를 든다. 우리 몸의 유전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유전자들은 협동 과정을 거쳐 각자 자신의 이익을 관찰시키고 있다. 서로 도와가며 염색체를 만들고 세포를 형성하며, 세포들이 모여 기관을 이루고 생명 활동에 필요한 각종 물질을 생산해 내야 우리의 생존이 가능하다. 아니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어릴 때 들었던 신체의 각 부위끼리의 싸움에 관한 우화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손, 발, 눈 모두 입은 놀기만 하고 맛있는 음식은 혼자 먹는다고 불평이었다. 입이란 놈을 벌주기 위해 손과 발이 일을 중단하자. 온 몸이 함께 기운이 없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결국 협력해야 된다는 이야기다.


유전자라는 것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협동과 협력이 서로 경쟁하는 것보다 더 이익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몸은 몇 십조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지만, 한 사람의 모든 세포는 모두 같은 DNA를 가지고 있다. 범죄의 사실이나 친족확인을 위해 DNA검사가 일반에게 서비스되어 상용화되고 있는 사회다. 이 DNA는 신체 어느 부위에서도 채취해도 같은 것이 나온다. 같은 DNA를 가지고 있지만 스위치가 켜져 있는 유전자만 발현하여 각기 다른 세포로 만들어지고 또 기능한다. 이 모든 세포가 협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다. 아마도 모두 같은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그 DNA 말이다.


협력하고 협동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협업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협업의 방법 중 하나는 분업이다. 협업이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이고, 분업 나누어서 일을 하는 것이다. 각자의 개성이나 능력과 상관없는 단순한 분업이라도 상당한 생산성의 증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국부론>에서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핀 제조공장을 예로 들어 분업의 이익을 설명한다. 핀 제조공정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각자가 자신의 분야에만 종사하게 되면 10명이 하루에 4만8천여 개의 핀을 만들 수 있으나, 한 사람이 모든 공정을 혼자서 수행하면 20개도 못 만든다. 이런 경우 분업을 통한 생산성 증가는 240배나 된다. 이러한 엄청난 생산성의 증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시간의 절약에서 온다. 하나의 공정에서 다른 공정으로 옮겨가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여기에 각자의 일에 숙련되면서, 생산성은 더 높아 질 것이다. 더 나아가, 각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사람의 개성에 따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섬세한 작업에 능숙하고, 또 일부의 사람들을 다른 사람보다 힘이 세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디자인에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협업을 통해 생산성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여기에 함께 일하면서 얻는 즐거움을 더 한다면 인간사회에서의 협력은 거절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 된다. 역사적으로도 스스로 조직화를 잘 하고 협력하는 사회가 그렇지 못한 사회를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지배해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문제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진 우리들 중 일부는 그런 사회적 합의를 깨고 있다는 것에 존재한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나오는 것이 제도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기적인 행위가 기승을 부리면, 제재가 강해지고 다시 새로운 행태의 이기적 배신행위가 만연하면 다시 사회적 비용을 들여가면서 제재를 강화하면서 사회는 발전하여 온 셈이다. 게임이론에 누구라도 들어 보았음직한 ‘죄수의 딜레마’라는 것이 있다. 두 용의자가 협력하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이기적인 의사결정 때문에 불리한 결과를 얻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잘 알다시피 ‘죄수의 딜레마’ 게임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도록 독립된 밀폐공간에 갇힌 공범자인 두 죄수에게 선택의 상황이 주어진다. 죄를 자백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 사이의 선택이다. 둘 다 부인하면 모두 1년씩 형을 받게 된다. 만일 둘 다 자백하면 각각 5년씩 형을 받게 된다. 따라서 둘 다 부인을 선택하는 것이 둘 다 자백을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한 사람은 죄를 부인하는데 다른 한 사람이 자백을 하는 경우에는 모든 죄를 부인한 사람이 뒤집어쓰면서 20년 형을 받게 되고 자백한 죄수는 석방이 된다. 어떤 것이 각자에게 최선의 선택일까? 정답은 두 사람 다 자백하는 것이 각자를 위해 최선의 선택이 된다. 두 죄수 중 한명이 나라고 가정하고, 상대방이 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따른 나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부인을 할 경우 최선의 선택은 자백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 자신은 석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자백하는 경우에도 나의 선택은 ‘자백’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죄를 내가 뒤집어 쓸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협력하여 모두 죄를 부인하면 1년 형으로 끝날 것을 서로 자백을 선택함으로써 함께 5년씩 형을 살게 된다는 말이다. 각자 합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에게 불리한 결과를 얻게 된다.


만약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 한번이 아니고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매 게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결과는 단 한번에 끝나는 죄수의 딜레마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의 룰을 조금만 바꾸어 놓으면 협력하는 상황이 더 우수한 전략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상황을 변경하여 벌칙이 크지 않은 현실에 가까운 경우를 생각해 보자. 두 명의 죄수가 한 감방에 갇혀있다. 이 감방의 창문은 아주 높아서 사람의 키로는 닿지 않기 때문에, 두 죄수가 협력하지 않는다면 도망갈 기회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이 밑에서 받쳐 주고 창문에 먼저 올라간 사람이 끌어 올려 준다면 둘 다 도망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도와주기로 약속한 첫 번째 죄수가 창문에 올라 선 후에 약속을 깨고 혼자 도망가는 경우다. 첫 번째 죄수는 두 번째 죄수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도망가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 반면에 두 번째 죄수는 다른 죄수가 도망간 것에 대한 책임까지 덮어쓰게 되므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경우 현실이라면 들킬 수 있는 확률과 벌칙의 크기에 따라 다른 선택이 이루어 질 수 있다. 아직 간수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먼저 창문으로 올라간 죄수는 자신을 도와준 죄수의 손을 잡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국 미시건 대학의 정치학자 액셀로드Robert Axelrod는 1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사례를 들어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 반복되면 서로 협조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독일군과 영국군이 참호를 파고 대치한 상황에서 시간이 흐르자 양쪽 모두 그저 총을 쏘는 시늉만 했다고 한다. 식사 시간에는 서로 공격을 않는 ‘예의’도 지켜가면서 말이다. 양쪽이 정말 살상을 위해 사격을 한다면, 양쪽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이기심이 늘 협력하도록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협력하는 것이 이기적인 유전자 그리고 이기적인 인간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배신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기적인 유전자는 자신의 유전자가 더 많이 복제되고 더 오래 증식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유전자가 오랫동안 존재하려면, 더 나은 미래의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어떤 유전자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이익에 집착한다. 멍청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유전자 덕에 사회는 더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


도덕심 함양을 위한 교육, 법을 이용한 제제와 같은 것들 모두 함께 지불해야 할 비용이다. 동물들도 자신들의 사회에서 배신을 감행하는 동물에게 벌을 주기도 한다. 예들 들어 침팬지 사회에서도 자기 것만 챙기는 이기적인 존재는 린치를 당하는 등 처벌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도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경우 큰 문제가 없었을 수 있다. 그 마을의 촌장과 어른들이 배신자를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생활을 하면서, 마을의 어른들 말씀만으로는 제재하기 어려워 졌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거나, 손해를 주는 경우를 막기 위해 인간은 종교와 도덕심 그리고 법에 힘을 빌릴 수 밖에 없게 된다. 인간사회는 일찍부터 협력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협력에 의한 ‘선’을 추구한다. 기원전 2000년경에 이미 수메르에는 우르남무 법전이, 바빌론에는 함무라비 법전, 유대인들에게는 10계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였고 우리나라에도 고조선 시대부터 8조금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법 모두 협력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처벌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도둑질이나, 상해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고대 법의 특성 중 하나는 대부분 동태복수법(Lex Talionis)이라는 것이다.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처벌을 내리는 법이 바로 그것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바로 협력하는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회의 협력 정도는 질서와 신용으로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협력이 용이한 사회가 경제적으로도 더 발전하고 있다. 사회적 비용이 절감되는 셈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렇다면, 선진국에 사는 사람이 더 이타적일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오늘날의 협력이 어쩌면 일찍이 사회적 비용을 먼저 치르고 얻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많은 사회적 배신자가 존재했을 수도 있고, 그런 이유로 더 엄중하고 엄격한 법률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단기적이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멍청한 유전자’ 덕분에 수많은 법률가를 양산해 낸 셈이다. 그 비용을 우리 모두가 함께 지불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회가 처리해야 할 일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의 차원에서 우리도 잠재적인 배신자를 위해 다양한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상대의 의도를 읽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귀납적 추론 능력을 갖게 된 것도 상대의 속임수를 찾아내기 위해 발달했다고 설명한다. 상대방에 대한 나름대로 가설을 세우고 그가 행하는 것을 보면서 검증을 계속한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사람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그에 대한 검증을 반복하면서 귀납적 사고 능력이 생겨난다. 사람을 보는 눈이라는 것도 그렇게 생긴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에릭 바인하커의 <부의 기원>에서도 소개되고 있지만, 액설로드는 이 문제를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수학적 분석 대신 여러 사람을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직접 참가시켜 승자와 패자를 갈라 보는 방법이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과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단판의 게임이 아니라 복수의 게임이 되고 한 게임의 점수가 아닌 전체 게임에서 얻은 점수가 승패를 결정한다. 좀 더 현실적인 삶의 모습에 가까워진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가장 우수한 전략은 고대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을 팃포탯(Tit-for-tat)이라고 부른다. 사전적 의미는 ‘맞받아치기’라는 것이지만, 전략적 요소는 우선 신사적이되 상대가 배신하면 반드시 그리고 즉시 보복한다는 것이다. 즉 일단 처음 만난 상대에게는 무조건 협조하는 편을 선택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내린 결정을 보고 그대로 반복하는 전략이다. 즉, 상대가 배신을 하지 않는다면 나도 계속 신의를 지킨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배신하면 나도 배신으로 상대를 응징하는 것이 최상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시행된 동태복수법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인간은 원래부터 자신의 인간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국의 길버트 로버츠Gilbert Roberts와 토마스 셰라트Thomas Sherratt교수는 “동물 사이의 협력은 축적된 투자에서 나온다”는 연구결과를 과학주간지 <네이처, 1998. 7. 9>지에 소개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협력은 상대방의 협력과 신뢰를 얻어내고 변절 가능성을 막기 위한 일종의 투자’가 된다. 이들이 소개하고 있는 바다오리는 자신의 부리로 상대방의 날개를 서로 다듬어 준다고 한다. 그런 단순한 협력을 통해 서로 탐색하면서 신뢰감이 쌓이면 나중엔 음식을 공유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로버츠와 셰라트 교수는 더 나아가 이런 종류의 게임을 컴퓨터를 통해 변절을 0’으로 두고 협력 정도에 따라 점수를 매겨 여러 가지 협력의 전략들을 비교하는 모의실험을 해보았다.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들은 `판 키우기(Raise-the-Stakes)’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배신을 막기 위해 협력의 크기를 상대방이 베푼 협력의 정도와 같거나 조금 많은 정도로 하지만, 점차 협력의 정도를 높여가는 전략이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협력과 신뢰가 쌓여지면 좀 더 높은 단계의 협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처음 본 상대에게는 얼마간 탐색전을 핀 후 협력의 강도를 결정한다. 단 한 번뿐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선 배신이 우월한 전략이 되지만 반복적인 게임이라면 협력이 더 유리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신용도 결국은 거래 관계가 얼마나 반복적이고 지속적이냐에 달려 있다. 아담 스미스는 “규모가 크고 상거래 빈도가 잦은 상인일수록 자신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정직하게 행동할 인센티브가 크다”고 지적한다. 세상에 가장 장사를 잘한다는 화교나 유태인이 신용을 목숨만큼 중요시 여기고 또 그 신용을 대를 이어 지켜간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협력을 위해서 신용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기도 하지만, 그 만큼 얻기도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스티븐 코비가 말하는 감정계좌와 비슷한 신뢰계좌를 우리 모두 가지고 있다. 즉 서로에게 신뢰를 쌓고 또 신뢰라는 자산을 주면서, 서로 그 계좌를 관리하는 수 밖에 없다. 신뢰계좌가 마이너스로 내려간 사람과는 가능한 관계를 청산하거나 조심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쌓아놓은 신뢰계좌에서 나의 신용이라는 자산의 잔액을 쌓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협력관계를 상호적인 이타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기주의에 대해 별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기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 이기적이라는 것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기심은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인간의 이기심을 부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선택이 될 수 있다. 많지 않더라도 ‘멍청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협력하고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지만, 사람에게 속고 배신당하게 되면 엄청난 비용과 고통을 치러야 한다. 함부로 사람을 믿어선 안되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는 것만도 안 되는 세상이다. 다른 사람과 협력하여 사는 방법 이외도, ‘멍청한 유전자’에게 속지 않는 판단력을 익혀두어야 한다. 그들과의 만남을 가능한 회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멍청한 유전자를 선별하고 또 대응하기 위해 팃포택전술과 신뢰라는 은행계좌관리를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한 지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