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 제 2 교시: 화학과 생물시간: 모두 다른 세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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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다른 문학과는 달리 ‘로드무비(road movie)’라는 특별한 장르가 있다. 로드무비는 흔히 어디론가 정처 없이 가면서 길에서 겪게 되는 일들을 그리는 영화다. 그런데 왜 수많은 공간 중에 길이라는 것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도시, 산, 강, 바다 같이 더 큰 공간에 무비라는 단어를 붙여 만든 장르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길은 고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향은 다시 가족과 연결된다. 1991년 상영된 영화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는 마이크(리버 피닉스)와 스콧(키아누 리브스)이 각자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에 대한 영화다.

두 주인공 다 포틀랜드의 부랑자다. 마이크는 고향 아이다호에 어머니를 남겨두고 떠나온 신세지만, 스콧은 포틀랜드 시장의 아들로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집을 나와 거리의 부랑자로 생활하고 있다. 두 개의 상반되는 세상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주인공 마이크가 황량한 사막 위의 길에서 뱉어내는 다음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밀양>의 송강호는 이 세상이 모두 같다고 대답하고 있는 데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는 모든 길이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의 얼굴처럼 모두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허긴 세상에 똑 같은 길은 하나도 없다. 우리들이 등교 길에 또는 출근 길에 늘 보고 있는 길도 매일 같지 않다. 모든 길과 사람에 공통점이 있고 차이점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것들을 관찰해 가면서 세상을 이해한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은 모두 밤에 동쪽 하늘에서 떠서 서쪽 하늘로 진다. 모든 별들이 사이 좋게 지구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아니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정도 관찰이라면 누구라도 모든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는 거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이라고 불리는 몇 개의 별이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관찰하게 된다. 이를 통해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행성들과 함께 회전한다는 지동설을 제안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관찰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관찰의 대상은 역시 전체를 일부로 쪼개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질 때 더 잘 나타난다. 코페르니쿠스는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 중에 멋대로 움직이는 행성에 집중했다. 이런 것을 관찰이라고 할 만하다. 대부분의 일이 정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모든 지식은 관찰에서부터 얻어진다. 허긴 정리를 하기 위해서는 자료가 되었던 정보가 되었던 일단 그들을 우리 눈앞으로 가져다 놓아야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은 모두 조금씩 다르다. 실제는 같다고 하더라도 늘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만 바라 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화면에 담는다. 카메라는 보이는 대상에 대하여 차별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을 가질 뿐 아니라, 나름대로 편집을 하기도 한다. <메멘토>의 레너드 말처럼 생각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 돼 버리고 만다. 하나의 사물에는 형태와 색뿐 아니라, 질감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조와 기술 그리고 나름대로의 역사가 담겨있다. 관찰이라는 것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더 깊은 곳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우리의 감각기관과 뇌는 그렇게 발달되어 온 것처럼 보인다. 무엇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듣고, 만지고, 느껴야 한다.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는 자신은 길의 감식가라고 말하면서 “나는 평생을 길을 맛보며 살았다”고 우긴다. 길을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맛을 안다는 말이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그 사람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살아온 역사를 추리한다. 그런 추론이나 인식에 오류가 발생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파편적인 정보를 맞추어 낼 수 있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만져본 감각의 종합적인 판단을 통해서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뛰어난 관찰자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힘은 인내심과 관심, 그리고 집중력에서 나온다. 모두 지나치는 사소한 것을 오랫동안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 자체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지식의 시작이 관찰이라면, 의미 있는 관찰이 되기 위해서는 동기가 충분해야 한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특히 잘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적이 있는 지식(Know-for-what’)을 강조해온 이유는 여기저기 있다. 새롭게 식당을 해보려고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거리의 모든 곳이 식당의 간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뇌가 그렇게 지시를 하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시장 통에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운동장이나 공연장에서 나의 친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찾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필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편견을 가진다거나 실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목표와 관심사를 잘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기는 하다. 그렇지 않다면, 원하는 것조차 다른 것들과 섞여버려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상의 생활에서 세세한 것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의 옥의 티라고 해서 잘못된 설정을 찾아 낸다. 첩보 영화의 주인공은 한번 방문한 장소에 놓여있던 물건들을 순식간에 기억해 낸다. 모두 관찰을 습관화한 덕택이다. <생각의 탄생> 저자 루트번스타인은 관찰이란 보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사용하여 느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리버 피닉스가 길의 맛을 알아내는 감식가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감각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관찰하려는 대상의 입장에 서보는 거다. 사실 이것만큼 상대방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일종에 감정이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관찰의 대상 속에 이입시켜 마치 대상이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 말이다. <생각의 탄생>은 이런 감정이입이 과학자의 관찰에도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평생을 옥수수와 함께 유전학을 연구한 바버라 매클린턱Barbara McClintock을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옥수수를 연구할 때 나는 그것들의 외부에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안에서 그 체계의 일부로 존재했다. 나는 염색체 내부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내 친구처럼 느껴졌다. 옥수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나 자신처럼 느껴졌다.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연구하는 대상과 감정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객관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은 아인슈타인과 파인만을 비롯한 많은 위대한 과학자가 밝혔듯이 과학에서도 그 시작은 감성적인 몰입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지적한다. 아인슈타인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내가 신이라면 우주를 어떻게 창조할까”하고 물었단다. 언급하였듯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직관과 통찰에 의해 발견의 실마리가 찾아지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가설은 만들어 진다. 그런 가설은 다시 분석과 통합에 의해 검증되면서 관찰의 대상이 실체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저서의 제목 <생명의 느낌>처럼 매클린턱은 그녀가 실험대상으로 삼은 옥수수가 실험대상이 아니라 친구이자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물의 이해는 관심과 집중 그리고 공감이라는 관찰을 통해 시작된다. 관찰이라는 것이 결코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는 말이다. 오래 전인 1958년 발간된 <과학적 발견의 패턴>의 저자 노우드 핸슨Norwood Hanson은 어떤 관찰과 이론도 관찰자가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관찰 자체가 이미 알려진 이론에 영향을 받으며, 또 도움을 받고 있다. 누구라도 자신이 가지는 목적이나 동기로부터 독립적이기는 어렵다.


어떤 자세로 임하던 관찰의 과정에서 우리는 연구대상을 잘게 분리해서 바라보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관찰의 기본은 전체를 나누어 살펴보는 과정을 포함하게 되어 있다. 숲 전체를 보고 나무를 보던지 아니면 나무 하나하나를 살펴본 후 숲을 바라보던지 그 순서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밖에는 없지만, 나무 하나씩 살펴보는 작업 없이는 숲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관찰에 있어 대상을 나누어 살펴봐야 할 이유는 최소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기(知己)에서 논의한 것처럼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이나 감각기관이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은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동물들이 가지는 정확도보다는 모호성을 신속하게 파악하도록 진화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언급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너무 많은 요소를 한번에 생각하는 데도 매우 미숙하다.


분석이나 관찰의 대상을 잘게 잘라서 살펴보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세상이 그렇게 생겨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대부분은 복잡성으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넓이로는 프랙탈의 집합으로, 깊이로는 몇 가지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다. 같은 종류의 패턴이 계속된다면, 하나의 패턴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몇 안 되는 구성인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안으로 들어가 그 구성인자를 찾는 것이 효율적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복잡한 사물도 셀 수 있을 정도의 구성요소와 그들간의 관계에 의해 만들진 것들의 합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 결과는 단순한 합이 아닐지라도 그렇다.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 단순한 요소들이 결합해서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은 우주의 보편적인 원리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 시대 사람 데모크리토스Demokritos는 세계의 궁극적인 실재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원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플라톤Platon은 아르케라는 원질이 이미 존재했고, 신은 이 원질을 소재로 해서 네 개의 원소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흙, 불, 공기, 그리고 물이 그것이다. 즉 물체를 이루는 근본적인 단위는 물, 불, 흙, 공기이며, 만물은 그 네 가지가 적당하게 섞여 있는 것이라 믿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오행 즉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의 다섯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 관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물(水)을 생명의 기본으로 하는 나무(木)는 불(火)에 타고, 불(火)은 흙(土)의 모태이며, 흙(土)은 금(金)의 뿌리다. 또 금(金)속에는 물(水)이 나며, 물(水)은 다시 나무(木)가 살기 위한 필수요소가 된다. 결국 모든 물질의 근원은 돌고 돌 뿐 어떤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양의 오행설이나 플라톤의 생각은 오늘날의 물리학 관점에서 보면 현실 감각이 없는 추상적인 구상이며 극히 관념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과학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제 과학자들은 이러한 철학을 기반으로 물질을 좀 더 잘게 짤라 나가기 시작한다.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은 분자의 존재와 분자의 운동을 알아냈다. 물질의 성질을 유지한 가장 작은 기본 단위가 바로 이 분자다. 분자를 더 쪼개면 원자가 된다. 원자는 더 이상 물질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 1897년에는 영국의 물리학자 톰슨Joseph Thomson이 원자보다도 더 기본적인 전자라는 존재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톰슨과 함께 연구할 기회를 가지게 된 뉴질랜드 태생의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에 의해 1911년 원자핵이 발견된다. 그 후 계속된 과학자들의 분해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원자가 다시 원자핵, 양성자와 전자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물리적 구조를 점점 잘게 짤라 가며 궁극적인 근원을 추적해 가면서 분자가 원자로, 원자가 아원자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는 말이다.


분석해야 할 대상의 모든 것을 작은 단위로 쪼개는 것은 분석적 사고의 시작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잘게 쪼개는 것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 가능하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 구조라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문제가 속한 분야를 많이 알수록 분해하기가 쉬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영학 분야에는 많은 학자와 비즈니스 컨설턴트 덕분에 이미 수많은 정형화된 틀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마케팅에 관한 분석이라면 마케팅의 4P를 기본 구조로 하여 문제를 분해해 볼 수 있으며,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라면 SWOT분석으로 시작할 수 있다. 이런 지식은 복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것을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우 유용한 생각의 틀이다. “모든 것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을 때까지 단순화해야 한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지혜라면, 그 지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부적인 지식이 필요한 셈이다.


이 세상에 사는 65억의 인구가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들이 모두 다른 지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경이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들을 분류하고 다시 정리해 보면, 세상은 단순해 질 수 있다. 우리는 종종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을 판단하기도 한다.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예측력이 있기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물론 혈액자체가 사람의 기질을 결정한다는 보고는 없다. 하지만 집안이나 종족간의 기질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혈액이라는 것도 유전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혈액이 성격을 규명하지는 않지만 같은 집안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체질을 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소음인의 4가지로 나누고 있는 동양의 사상의학(四象醫學)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론들 모두 과학적으로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단지 관찰과 분류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설은 어쩌면 같은 분류에 속한 사람들은 좀 더 가족에 가까울 것이라는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온 인류가 하나의 가족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잘게 잘라놓은 것을 다시 정리하고 분류하는 것은 중요한 연구과정 중 하나다. 화학의 경우에는 멘텔레예프 Mendeleev의 주기율표에 의해 화학물질이 정리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화학에서의 주기율표는 단순히 원소들을 모아놓은 표가 아니라, 표 자체가 화학의 법칙이다. 주기율표는 원소의 화학적 성질이 일정한 순서에 따라 주기적으로 변화한다는 법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주기율표는 영국의 과학자 존 뉴런즈John Newlands가 원소들을 원자량의 순으로 배열하면 8번째 원소마다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7개씩 묶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색이나 음과 같이 물질도 7개의 기본 성질로 이루어 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뉴런즈의 분류를 음의 분류와 비슷하다 하여 ‘옥타브 법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재는 비활성 기체가 발견되어 화학테이블이 7개로 구성된 옥타브가 아니라 8번째 음이 더 있다는 것이 알려졌으니 오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화 작업으로 인한 화학의 발전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후 멘델레예프와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오늘날의 주기율표가 만들어 졌다. 정리 하나 잘 하는 것만으로 엄청난 량의 지식이 단순화되고 또 중요한 가치를 만들어 낸 셈이다. 이제 우리는 주기율표만으로도 원소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뿐 아니라, 전자의 수 그리고 그 질량 즉 무게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화학자들은 매우 영리했을 뿐 아니라 운도 상당히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나는 세상은 처음부터 그렇게 주기적인 규칙성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복잡한 종류의 것들을 만나면 어떤 방법으로 분류하는 것이 좋을까? <로지컬 씽킹>의 저자, 하나코照屋 華子와 케이코岡田 恵子는 이에 대해 간단한 원칙을 내놓고 있다. 미시(MECE)라는 접근 방법이다. ‘MECE(Mutually Exclusive and Collectively Exhaustive)’란 수집된 정보를 전체집합으로 보고, 이 전체집합을 누락도 중복도 없이 어떤 부분집합으로 나누어 보는 방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 ‘겹치지 않고(Mutually Exclusive)’ 또 ‘빠뜨리지 않고(Collectively Exhaustive)’ 관련된 사실을 모두 망라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유형을 정리하면서 특별히 별난 사람들을 빼버리거나, 두 개의 유형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분류는 몇 단계까지 계속될 수 있다. 대분류로부터 시작하여 논리적 순서에 따라 작은 단위로 분해할 경우에는 로직 트리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로직트리란 우리가 흔히 보는 가지치기로 분류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길에 대한 조사를 한다고 해보자. 이 경우 세상의 모든 길을 자동차가 갈 수 있는 길, 오토바이가 다닐 수 있는 길 그리고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다시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라는 소분류를 만들어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로직트리는 계속해서 가지를 쳐 나갈 수 있다.


생물학은 본질적으로 분류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의 역사 자체가 새로운 생물을 관찰하고 발견하면서 발전해왔다. 지구상에는 아주 다양한 종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종은 대충 200만 내외라고 한다. 반면 실제로 생존하고 있는 생명체의 종류는 적어도 1,000만 이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생물이 확인된 종보다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종이란 유전적으로 유사하고 서로 생식이 가능한 식물 혹은 동물의 집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 모든 종들을 확인하고 추적할 수 있을까? 전부는 아니라도 잘 분류된 체계가 큰 도움이 된다. 약 2,000년 전에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로 분류 체계를 고안하여, 생물을 식물과 동물로 나누었다. 이후 점차로 복잡해 지면서 오늘날의 종, 속, 과, 문, 강, 계 6단계로 나누어진 분류체계가 만들어 졌으며, 생물학자들은 아예 생물의 분류를 표현한 로직트리를 생명의 나무(tree of life) 또는 계통수(系統樹)라고 부른다.


문제는 새로운 생물이 늘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MECE의 방법 중 CE, 즉 누락 없이 분류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킬 수 없게 한다. 실제로 생물학자들도 새로운 생물들을 발견하면서 분류 체계를 바꿔야만 했다. 물질을 발견하며 분류해온 화학자들에 비해 운이 덜 따른 셈이다. 1735년에 스웨덴 사람 린네Carl von Linne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동물과 식물이라는 두 개의 ‘계(Kingdom)’로 생물을 분류했고, 그 후 미생물이라는 것이 발견되자 1866년 독일의 해켈Ernst Haeckel이 미생물을 원생생물이라고 이름을 부여하고, 동물, 식물, 원생생물이라는 세 개의 계를 설정했다. 1937년 샤통Édouard Chatton이라는 프랑스 미생물학자는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세포 내 소기관이라며, 원생생물을 세포기관이 분명한 진핵생물계와 그런 게 없는 원핵생물계로 나눌 수 있었다. 1969년에 미국의 위태커Robert Whittaker가 효모와 버섯 등이 속하는 균류를 따로 분류하여 만든 동물계, 식물계, 균계, 원생생물계, 원핵물계의 5계 체제가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여기서 균류라고 하는 것은 다른 생물체에 기생하여 살지만 아주 작은 세균이 아닌 것들을 가리키는 셈이다. 반면 원생이니 원핵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미생물이며 세균 같은 것들이다. 다시 세포 안에 핵이 없는 원핵생물의 세균을 지구상에 먼저 태어났으며 극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의 원시세균을 따로 분류하거나, 세포를 갖추지 못하고 타세포에 기생해 살아가는 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바이러스를 별도로 정리하여 6계의 체제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런 분류의 변화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생명체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 아니 생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분류가 변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 말이기는 하다. 여하튼 이런 분류체계에 의해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복잡한 생명체가 구성하고 있는 복잡계를 단순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장황하게 화학,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그리고 종교 이야기까지 늘어 놓은 것은 그 하나하나가 방대한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결과로 얻어진 원리와 원칙은 비교적 단순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자연과학의 개척자인 갈릴레이 그리고 케플러와 뉴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이 복잡한 세상을 몇 개의 공식으로 단순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간단한 몇 개의 공식을 가지고 인류를 달까지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법칙에는 늘 작동하는 불변의 진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법칙은 자연의 규칙성에 대한 근사적 묘사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에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다양한 법칙이 존재한다. 밀양의 주인공 종찬의 말처럼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 원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인간사회의 법칙은 불행하게도 몇 가지 조건하에서 작동되는 것들이다. 미래에 대한 조건을 확신할 수 없다면 일정한 확률 내에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법칙은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거나 수정이 불가피하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나름대로의 원칙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 원칙이라는 것이 자연의 원칙에 가까울수록 더 힘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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