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점령당한 티베트를 떠나 팔덴과 니마는 히말라야의 한 사원으로 향한다. 승려가 되고 싶은 두 소년이 도착한 사원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엄숙함이나 경건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축구 열풍 때문이다. 수도승들의 입으로는 불경을 읽으면서 눈은 스포츠 잡지에 가 있다. 사원의 벽은 각 나라의 축구 스타들 사진과 “파라과이 만세”, “독일 이겨라” 등의 낙서로 가득하다. 1999년 상영된 ‘컵(The Cup)이라는 영화의 배경이다. 티베트의 끝이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부탄 출신의 영화감독인 키엔츠 노부Khyentse Norbu가 메가폰을 잡고 티베트 스님들이 배우로 출연한 영화다. 실재로 월드컵에 열광하는 티베트 스님들의 이야기를 근거로 만들었단다. 영화의 끝 부분에 이 절의 주지 스님이 어린 동자승들을 모아놓고 한 마당 가르침을 펼치시는 장면이 나온다.
주지스님: 걸을 때 부드러움을 느끼려면 온 세상에 가죽을 덮어야 할까?
동자승: 아닙니다.
주지스님: 그럼 뭐가 좋겠느냐?
동자승: 내가 가죽 신발을 신으면 됩니다.
주지스님: 그래 가죽 신발을 신으면 될 것이니라. 그럼 어디를 가나 부드럽겠지.
주지스님은 이 말에 해석도 달아 주신다.
“나 한 사람의 발에 가죽 신발을 신는 것이 온 세상을 가죽으로 덮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되느니라. 만사가 이것과 마찬가지야. 이 세상에는 원수와 적과 마귀와 온갖 악한 것들이 어느 곳이나 할 것 없이 도처에 널려 있지만, 자신에게 유해한 그것들을 일일이 모두 물리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 한 사람의 마음을 평정시킬 수만 있다면, 내 마음의 복수심과 적대감, 유혹과 사악한 생각을 다스릴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악한 것을 물리친 것과 같다.”
학문의 즐거움이나 깨달음 자체에 희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성공적인 일상을 위해 지식을 습득한다. 그런 지식들이 축적되고 자신의 경험에 녹아 들어가 나름대로 삶의 지혜를 얻어낸다. 우리도 그런 지혜를 구하기 위해, 나 자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사회를 단순화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런 과정이 각각 지기와 지피다. 이 모두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며 행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아직 하나의 과정이 더 남아있다. 지기와 지피를 만나게 해야 하는 일이 그것이다.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 문제가 없고, 상대가 없는 경쟁이나 제한이 없는 선택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남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나의 환경을 결정하고 있으며, 남에게도 나라는 존재는 그의 조건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어떠한 형태로든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지피와 지기가 따로 놀아서는 아무리 많은 지식이라도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그렇게 지피와 지기를 통합해 가면서 세상에 나가서 행하기 위한 원칙을 세우고 전략을 펼쳐내야 한다. 삶에 있어서 원칙이란 근본적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관점에 의해 강화되는 것이다. 여기서 원칙이란 결국 우리의 가치관을 가리키며, 우리가 살면서 늘 만나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기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 전략은 다시 그런 원칙에서 벋어나지 않는 것이어야 제대로 작동한다. <더컵>의 주지스님은 전략의 속성과 좋은 전략의 한 단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딱딱한 세상을 만났을 때 세상을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발에 가죽신을 신듯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런 것을 전략이라고 할 만하다. 전략이란 남을 이해하고 나를 아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창조적 생각이니 말이다. 이런 식의 전략적 사고는 중국의 손자가 살던 시대부터 디지털 경제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다.
동양의 철학은 오래 전부터 이런 식의 지피지기를 강조해 왔다. 도가(道家)의 도는 자연의 원리를 가리키며, 덕(德)은 그 원리와 합치되어 사는 삶을 의미한다. 이 두 글자가 만나면 도덕(道德)이 된다. 그래서 도(道)를 잘못 세우면 덕(德)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도덕은 딱딱하고 어색한 것이 될 수도 있는거다. 동양사상은 대체로 자연을 도전의 대상이 아니라, 순응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강조한다. 세상은 인간과 하나로서, 조화와 조절을 통해 살아가야 하는 대상인 셈이다. 반면에 서양사상에서 자연은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고 끊임없이 도전해야 할 상대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도전에 대한 균형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전략이다. 늘 도전만 할 수도 없지만, 언젠가는 공격적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환경에 적응하며 때로는 도전하며 우리의 삶을 영위해 왔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표현대로 우리의 삶 자체가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의 역사다. 오랜 구석기 시대를 살아가면서 인간은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만들어 내는 등 인류의 생활양식을 조금씩 개선해 가고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의 원시상태에서 식량을 얻어내는 채집과 수렵 생활이 전부였다. 그러다 우연히 먹고 버린 식물의 씨에서 싹이 트고 열매가 맺는 것을 본 인간은 열매를 얻기 위해 여기저기 이동하는 것보다 농사를 짓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매번 먹이감을 쫒아다니는 대신 야생동물을 사로잡아 울타리 안에서 길들이는 방법도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농업혁명이 시작된 시기가 지금으로 부터 약 1만년전쯤으로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시점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농경과 목축이라는 것도 변화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인간의 응전이었을 것이다.
기후의 변화로 그 동안의 사냥감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린 데다가 인구가 늘어나면서 식량이 부족해지기 시작한 현상이 그런 변화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인류는 그렇게 생존을 위해 자연에 적응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자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역사학자들은 신석기 시대에 일어난 인간의 이런 응전을 인류 역사상 최초의 가장 큰 변화로 인식하여 농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 농업혁명을 <제 3의 물결>의 저자이며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제 1의 물결이라 부른다. 그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크고 작은 새로운 물결이 인류에게 몰려오지만, 실상은 모두 우리 인간의 도전정신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제 1의 물결인 농업혁명 이후에도 인간의 도전과 응전은 계속되어, 자연이 쉽게 보여주지 않는 것들을 찾아내거나 자연에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까지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발견과 발명이 과학의 역사이며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특별히 증기기관의 발명은 산업혁명의 방아쇠가 되어 생산방식에 큰 변화를 일으키며 물질의 풍요를 가져온 제 2의 물결을 만들어 냈다. 앨빈 토플러의 표현대로 농경사회에서 우리는 ‘날이 새면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날이 저물면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오랫동안 지속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도시로 모여들었고, 분업화가 가속화되면서 기계가 들어찬 공장에서 하나의 부품처럼 일하는 생산 노동자로 변신했다. 그런 혁명적인 변화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대량생산과 규격화로 특징지어지는 제 2의 물결을 약 300여년만에 헤치고 오늘날의 우리는 제 3의 물결이라는 더 빨라진 세상 속을 살아가고 있다. 정보화 혁명 덕분에 개인의 사회참여가 확대되고 선택의 자유가 증대되어, 개성이 존중되는 삶 그리고 다양하며 다원적인 사회 속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개인간의 경쟁 역시 심화되어 우리 모두는 지식노동자가 되어야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우리를 덮칠지 정확히 알 수 없고 더구나 그 변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그런 변화 역시 우리 인간의 욕구와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농업혁몀과 산업혁명이 더 많은 식량과 물질을 필요로 하는 생존의 욕구에 의해 촉발되었다면, 정보화혁명은 삶의 질을 높이려는 개인의 사회 참여 욕구와 성장욕구로 가속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미래의 변화 역시 개인의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욕구와 자아성취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새로운 물결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마다 우리의 생활의 양식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한 지식의 유형도 달라져 왔다. 사실 손자병법의 지피지기에서 피(彼)는 싸우기 위해 맞서 있는 상대 즉 적를 가리킨다. 만약 지피지기를 세계화와 정보화시대를 구분하듯 버전의 형식으로 정리한다면 지피지기 1.0은 투쟁과 생존을 위한 지식들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일대일의 투쟁에서 다수의 경쟁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는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점차 더 많은 상대와 경쟁해야 하고 경쟁의 범위도 넓어졌다. 경쟁을 위한 이런 지피지기를 2.0이라 부를만 하다. 네트워크 시대라 불리는 오늘날에의 피(彼)는 더 이상 경쟁상대만이 아니다. 따라서 지피지기의 3.0 버전에는 협력과 협동에 필요한 지식을 더해야 한다. 더 나아가 지피지기 4.0이라는 것이 있다면 뒤쳐져 있는 사람들과 파괴되고 있는 자연환경에 대한 배려와 지혜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뒤쳐져 있는 사람이란 토마스 프리드만Thomas Friedman이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표현하였듯이, 아직도 지구촌에 존재하고 있는 ‘병약한 사람들’, ‘무기력한 사람들’, ‘좌절한 사람들’이다. 점차 모든 것이 모두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상은 점차 더 복잡해지고 더 촘촘히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런 현상의 하나가 세계화다. 인간의 네트워크가 더 복잡해졌을 뿐 아니라 더 넓게 확장되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지피(知彼)에서 언급한 ’네트워크의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과거의 세계화가 주로 국가와 다국적 기업에 의해 이루어진 반면, 오늘날 세계화의 주체는 개인이다. 그리고 그 동력은 과거와 같은 군사력이나 화력선, 기차, 비행기 또는 전화 같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인터넷과 같은 소프트웨어들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 모두를 옆집에 사는 이웃처럼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복작거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이 복잡계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여러 번 논의하였듯이, 세상의 대부분은 수많은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복잡계다. 복잡계의 각 구성요소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상호작용을 주고받는다. 그 결과 각 요소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현상과 질서가 나타나게 되어 있으며, 복잡계 과학은 이런 현상을 창발(創發)이라고 부른다. 불에 타는 성질을 가진 수소 두 개와 산소 한 개가 만나면 불에 타지 않는 물이 되는 것처럼, 각각의 원인들이 모여 전혀 상관없는 결과를 낳는다는 말이다. 복잡계의 한 구성원인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오늘의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변화를 예측하고 스스로도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나만 세상에 대한 지식이 있고 또 전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전략에 대응하여 다른 사람들도 전략을 세우고, 나의 전략을 실행하려는 순간 남의 전략도 바뀐다. 결국 이런 개인들의 노력이 다시 우리 환경에 영향을 주어,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 낸다. 우리도 환경에 맞게 진화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인 복잡계 자체도 진화한다는 말이다. 하나의 시스템이 변하는 것은 각 구성원이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산물이다. 이러한 적응과 다양성이 모여 복잡계라는 시스템도 끊임없이 변한다. 개인의 적응과 도전이 모여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 내고 다시 그 물결이 우리를 덥치는 격이다.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그렇다고 모든 것이 혼돈의 세계는 아니다. 평형이 깨지고 임계점을 지나 폭발적인 변화가 다가 올 때도 있지만, 평형을 이루고 있는 안정된 시대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대부분 점진적 변화를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확률을 가지고 예측해 볼 수는 있는 세상이다. 우리 또한 정답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결정과 실행이 더 높은 성공 가능성을 가지도록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피지기는 세상에 나가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전략과 원칙을 찾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사실 세상을 살면서 모든 것에서 성공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한번은 성공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주어진다. 반드시 너무 앞서 갈 이유도 없다. 자주 변하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 볼 수가 없음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변화만을 이 시대의 덕목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 세상이 변한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은 한결같기 마련이다. 무엇이든 꾸준히 실행한 사람들은 크기의 차이뿐이지 무엇인가 이루어 낸다. 스스로 모든 것을 그리고 한번에 창조하겠다는 독단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삶을 변화시킬 정도의 창조적인 것들도 모두 과거의 선배들이 쌓아온 토대 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한 것을 따라한 것이 대부분이다. 혼자 할 필요도 없다. 성공한 사람들 뒤에는 늘 그들과 함께 한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가지게 된다.
리눅스 솔루션으로 성공한 회사 ‘레드햇’의 창업자 봅 영Bob Young은 “외톨이로서 쓸모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단언한다. 캐나다의 경영학 교수 로저 마틴Roger Martin이 탁월한 리더 50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기반으로 저술했다는 <생각이 차이를 만든다>에서, 봅 영은 그런 자신의 이야기가 ‘특급비밀’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모두 다 잘 하겠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이 이제는 상식이 되어야만 한다. 오늘날 처럼 변화가 빠르고 경쟁이 심한 세상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도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또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진정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조지 레오나르드 George Leonard의 <달인>에 나오는 말처럼 늘 훈련하고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실행에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 레오나르드는 다음과 같이 달인이 되는 길을 알려준다.
“달인의 길은, 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Stay on the long road to mast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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