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 날 제 2 교시: 철학 시간 – 다양한 시각으로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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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진실로 위하는 선생님과 그 선생님을 따르는 학생들의 이야기 <죽은 시인의 사회>는 1989년 제작된 영화다. 1990년 처음 출간된 토드 부크홀츠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도 이 영화의 제목에서 영감을 얻었을 지 모르겠다. 로빈 윌리엄스가 영어교사 키팅으로 나온다. 명문 웰튼 출신인 키팅은 자기가 졸업한 학교에 영어교사로 부임하여 오로지 명문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교정책과는 달리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사고와 인생에 대한 깊은 사유를 불어넣는다. 그를 캡틴으로 부르며 따르던 7명의 학생들은 키팅 선생이 말해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써클을 결성한다는 이야기에서 영화의 제목은 만들어진다. 하루는 키팅 선생이 책상 위에 올라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내가 왜 이 위에 섰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 책상 위에 선 이유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거야.”


우리는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해하고, 추론이나 상상을 통해 단순화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자르고 쪼개서 보는 세상은 조금씩 단순해지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상상력까지 동원하여 복잡한 세상의 진면목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얻어진 지식이나 이론이 모두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귀납적 추론의 예를 들어보자. 아침에 본 고양이가 검은색이었다. 오후에 본 고양이도 검은색이었다. 귀납적 추론이란 이런 경우 고양이는 검은색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라도 하얀 고양이를 보게 될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분석과 추론을 통해 얻어진 지식이 반드시 진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분석하고 특징에 집중하고 형상화한다는 것 모두 단순화라고 할 수 있다. 단순화라는 필연적으로 현실과 거리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화해서 얻어진 이론으로 세상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진리를 모두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이론이 가설이라는 말이 있듯이 완전하게 증명된 진리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실체가 아닐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추상적이거나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도 그렇다. 눈에 보이는 것의 모든 사물은 최소한 두면 이상을 가지고 있다. 입체적인 것이 아니라도 앞면이 있다면 뒷면도 있기 마련이다. 바닥만 보이는 지면도 지각 밑의 모습이 다르며, 입체감이 부족한 동전도 양면이 있다.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차이는 실체와 성질에서도 다르게 나타난다. 세상은 그 실체와 실체에 부수해서 존재하는 성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책상과 의자 등은 실체들이다. 책상과 의자의 색깔, 모양, 감촉 등은 성질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상은 까맣다”, “저 책상은 둥그렇다”고 말한다. 책상이 까맣다는 말과 둥그렇다는 말이 모두 하나의 시각이다. 따라서 이런 차이로 다툰다는 것은 정말 의미가 없는 일이다. 사실 색채란 물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뇌가 물체에서 반사되어 온 빛의 정보를 처리하면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사실 빛도 입자이면서 일종의 파장이다. 햇빛은 파장에 따라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등으로 나누어 질 뿐이다. 우리가 말하고 듣는 소리인 전파도 파장이다.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만이 실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도 이러니 감각할 수 없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보라. 사랑을 보는 수많은 시각의 차이를 우리 모두가 즐기고 있다. 반면 시각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서로 적이 되어 싸우기 하며,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기도 했다. 아마도 그 차이는 단순한 핑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온 세계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사상의 차이로 적대시 해왔다. 마치 하나의 지구에서 같이 살아갈 수 없는 상대라고 여겼을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양분된 사상으로 한 세기를 지내온 걸 보면, 시각의 차이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대에는 진리라고 여겼던 것이 오류로 판명 나는 경우도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각만이 진리라는 아집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사례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오류는 보통사람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대가들에게서 얼마던지 그 사례를 찾아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무거운 물체가 먼저 떨어진다”고 주장했었다. 이런 오류는 근대과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갈릴레이에 의해 오류라는 것이 밝혀졌다. 갈릴레이는 실험에 의해서 “가벼운 물체나 무거운 물체나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1829년 미국 뉴욕의 주지사 마틴 밴 뷰렌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앤드류 잭슨 Andrew Jackson에게 철도건설을 반대하는 서한을 보낸다. 그가 철도건설을 반대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운하와 선박 분야의 실업문제와 경제하강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철도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이 생기면, 운하를 이용하는 화물과 여행객이 줄어들 것이며 그로 인해 운하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자리가 줄어 들고, 관련 산업이 어려워 지면서 미국 경제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다. 오늘 날의 시각으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의견이기는 하지만, 미래를 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뉴욕 주지사 마틴 뷰렌이 자신의 의견에 대한 근거로 안전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대목을 보면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놓고 있다.


“각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철도 위를 운행하는 기차는 엔진의 힘에 의해 시속 약 24 킬로미터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립니다. 따라서 승객들의 생명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시골길을 굉음을 내며 달리면서 곡식들을 태워버릴 수도 있고, 가축들을 겁에 질리게 하며, 아이들과 여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런 위험한 속도로 내달리도록 허락하시진 않으셨을 겁니다.”


스티븐 코비의 아들 숀 코비가 자신의 아버지 책을 10대들에게 읽히기 위해 펴낸 <성공하는 10대들의 7가지 습관>에는 당시에는 통찰력있는 의견이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정말 바보 같은 발언의 예를 몇가지 더 들고 있다. 1876년에 씌여진 웨스턴 유니언 내부 문서에는 “전화는 통신 수단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이 기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전혀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다”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웨스턴 유니언사는 모스 부호를 이용해 전신전보 서비스를 제공하며 당시에는 최첨단 기업으로 인정받던 전기통신회사였다. 오늘날에는 국제송금회사로 재탄생되었지만, 통신회사로서의 명목은 1992년 부도로 끝이 난다.

1977년 중대형 컴퓨터 시장의 강자였던 디지털 이큅먼트 사의 CEO 케네스 올센은 “개인들이 집에 컴퓨터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며 개인용 PC의 상용화 가능성을 무시했다. 자신들이 중대형 컴퓨터 분야에서 성공한 경험 때문에 산업의 새로운 변화를 직시하지 못한 우를 범하고 말은 것이다. 1982년 출간된 톰 피터스의 <초우량 기업의 조건>에서 이 디지털 이큅먼트를 실험정신이 왕성한 기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는 대목과 대비된다. 허긴 컴퓨터의 대명사격인 IBM의 창업자 토머스 왓슨 전 회장도 1943년 “이 세상에 컴퓨터 다섯 대를 주문할 시장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빌 게이츠도 이런 고정관념의 함정에서 예외가 되지 못한다. 그는 1981년에 개인용 PC의 메모리는 ’64kb면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더 황당한 것은 1899년 당시 미국 특허청 책임자인 찰스 듀엘이 “이제 발명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발명했기 때문에 특허청을 폐쇄해야 한다”고 정부에 제안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으로 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거나 매우 오만한 발언이기는 하지만, 당시로서는 권위를 가지는 말이었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그런 주장은 새로운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부끄러운 편견으로 판명나고 만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진리도 이렇게 시행착오를 만들면서 찾아진다. 어쩌면 진리라는 것은 우리에게 단 한번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의 저자이며 오스트리아 출신의 과학철학자인 칼 포퍼Karl Popper는 인간의 합리주의적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방법이 옳다는 아집은 아직도 많은 분야의 학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인기 과목이 된 경제학과 경영학이 학문으로 성립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들 학문은 국가와 기업의 경영자에게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통찰력을 제시해 주었다. 반면 많은 학자들이 자신들만의 룰을 만들어 놓고 그 학문을 즐겨온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경제학은 수학을 이용한 게임의 룰을 만들어 그 게임에서 서로 대가임을 증명하는 놀이에 빠져 세월을 보낸 적도 있었다. 언급한 것처럼 오늘날 경제학은 점차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이며, 다양한 다른 학문의 시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심리학과 같은 사회과학뿐 아니라 자연과학의 방법론과 그 성과까지도 함께 통합하여 경제를 이해하려고 한다.


다양한 시각에 대한 관대함은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시각을 인정하다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낼 기회를 가지게 된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시각이나 관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더 많은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추세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물리학자가 자본시장을 연구하고 심리학자가 주식시장에 대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각 분야에 엄청난 진보를 가져 올 수 있다. 우리의 일상도 사실은 이런 방법에 의해 더 풍요로운 이해와 발전을 이루어 낼 수 있다. 학습에 있어서도 다양한 시각은 필요하다. 물리학의 대가이면서 강의도 최고였다는 파인만의 책만 읽으면 물리학을 통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른 학자들의 다양한 종류의 해석을 살펴 봄으로써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같은 학생이 쓴 글이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이해해 가면서 겪은 어려움이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경제학자가 쓴 물리학 이야기가 필요하고 소설가가 써내는 경제학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아니면 경제학자와 영화제작자가 함께 만드는 영화나 스포츠 해설가와 경영학자가 함께 해설하는 스포츠 중계가 성공을 거둘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동일한 정보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며, 기존에 저장해 놓은 정보의 종류에서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결국 표현하는 깊이나 넓이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미국 CBS는 2007년 1월 테리 케이Terry Kay의 소설을 원작으로 <빛의 계곡, The Valley of Light>이라는 TV용 영화를 방영하였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중 전쟁에 참여했던 젊은이 노아(크리스 클라인, Chris Klein)가 낚시를 하면서 미국의 강을 따라 헤 메는 것으로 시작된다.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다. 어느 호수가 옆 조용한 마을에 들른 노아는 정이 많은 사람들에 이끌려 그 마을에서 한동안 지내게 된다. 특히 엄마를 잃은 말없는 아이와 친하게 되는데 그 아이가 사고로 죽고 만다. 노아는 다시 그 마을을 떠나려 한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 마을에 살던 전쟁의 또 하나 희생자인 미망인 엘리노가 그에게 말한다.

“고통이 없는 곳을 찾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곳은 사랑도 없는 마을일거야”


모든 자연의 질서가 최소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겨울에 양지바른 곳은 여름에 뙤약볕으로 고생스러운 곳이 된다. 여름에 햇볕을 가려주던 고마운 나무가 가을이면 수많은 낙엽을 떨어뜨려 청소라는 수고를 만들어 낸다. 이익이 있는 곳에 반드시 위험이 있다. 점심을 공짜로 얻어 먹었다면, 나중이라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다. 경제학자들이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단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은 황산벌 전투로 나가기 직전에 자기 가족을 제 손으로 베어 버림으로써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한다. 계백은 아내에게 칼을 겨누며 이렇게 말한다. “호랭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혔다.” 그러자, 아내는 성난 얼굴로 이렇게 대꾸한다. “호랭이는 가죽 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 땜시 죽는 거여, 인간아.” 하나의 사실에도 이렇게 양면의 해석이 가능하다.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음양으로 설명해왔다. 음양설이 내세우는 가설은 “우주의 섭리는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자연은 음(陰)과 양(陽)의 배합으로 이루어지고 음양이 생성하면서 천지만물이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가정하에 인간의 신체와 기질 그리고 과일과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심지어 추상적인 것까지 모든 것을 음양으로 분류해 낸다. 이런 자연철학이 어느 정도까지 진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에 사물과 개념에 늘 상대적인 것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하늘과 땅, 해와 달, 바다와 육지,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위와 아래, 내부와 외부, 밝음과 어둠 등이 그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오묘함은 사실 변화에 있다. 그래서 세상은 더 복잡하다.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고 또 그에 따른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된다.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반드시 그렇게 된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그렇게 하게끔 작용한 힘과 그에 따른 반대의 움직임이 있다. 오늘날의 결과는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도 이런 질서는 존재한다. 하나의 면만 가진 인생사는 없는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양면을 보려는 자세와 다른 시각을 인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시각을 인정하는 것은 배려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겸손에 해당한다. 양면성 또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연의 원칙에 순응하는 삶이 되며 그로부터 인생의 지혜가 만들어 진다. 오늘의 행운이 나를 더 큰 어려움으로 이끌어 갈지도 모른다. 나에게 닥친 고통이 미래를 위한 좋은 훈련이 되고, 일상의 감사함을 알게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연탄길의 저자 이철환은 그의 산문집 <반성문>에 다음과 같은 시를 적어 놓았다.

“오랜 시간의 아픔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아픔도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