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날 제 1 교시 과학방법론 시간: 실재를 찾아가는 상상의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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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드라마 는 라스베가스에서 시작하여 마이애미 그리고 뉴욕으로 지속될 정도로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중이다. 비상한 추리력과 트릭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하던 <형사 콜롬보〉와는 달리, 〈CSI〉에는 유전자 검사, 레이저를 이용한 탄도 추적,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 모든 과학적 수사기법이 총동원된다. 당연히 수사팀을 이끄는 책임자 모두 역시 과학지식으로 무장된 사람들이어야 한다. 드라마 의 그리섬 반장(라스베이거스)과 호레이쇼 반장(마이애미), 맥 반장(뉴욕) 모두 ‘레벨3’다. 레벨3는 국제감식협회(IAI)가 인증하는 범죄 현장 전문가 자격 중 최고 단계로서, 관련 분야에 대한 논문이나 저서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현장 경험 6년 이상 그리고 신입 수사관 훈련교관 1년 이상의 경력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드라마 속의 반장들 모두 냉철한 판단력과 과학적 분석을 통한 증거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범죄 현장에서 완벽한 증거를 찾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 과학 수사대는 그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며 그것이 이 드라마의 진정한 재미다. 특히 <마이애미>의 호레이쇼 반장은 자신의 직관을 믿는 사람이다.


“과학! 그것은 범죄를 수사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결정해 주지는 않아. 나는 나의 직감과 상상력을 믿지. 과학이 그것을 확인해 주길 기대할 뿐이야”

다양한 측정장비와 컴퓨터 덕분에 현장에 남긴 사소한 증거까지 분석할 수 있기는 하지만, 범죄자의 자백이나 목격자 없이 범죄의 현장을 완전히 재현하기는 어렵다. 수사관들은 범죄의 실재와 관찰되고 분석된 자료를 연결할 고리를 찾아내야만 한다. 호레이쇼 반장은 그 방법이 직감과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루트번스타인은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직접 받아들이는 것들, ‘즉 일출과 일몰, 사진이나 드로잉, 종이 위에 휘갈겨 쓴 글씨들은 전혀 실재’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 쇼를 연출하는 영화 속의 감독 크리스토프는 대담프로에 나와 “우리는 진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눈앞에 보여지는 세상만을 진짜 현실로 착각할 뿐(We accept the reality of the world with which we are presented)”이라고 강조한다. 허긴 우리가 보는 물체도 실제가 아니긴 하다. 텅 비어 있는 공간에서 전자가 휘저으며 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보고 만지는 것까지 실재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너무 관념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데다, 우리 모두가 똑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셈이니 거기까지는 실재라고 인정하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리 없다. 단지 우리 모두 실재의 전부를 한번에 보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환경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로 분석을 강조해왔다. 분석이란 잘게 잘라 관찰하는 방법이다. 이런 작업의 결과로 세상은 조금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석된 결과 만으로 그 실체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분석의 과정에서 많은 정보가 실종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우리가 마주치는 세상의 사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물을 둘로 나누어 다른 물병에 넣으면 두 개의 물이 되지만, 더 잘게 자르기 시작하면 두 개의 수소와 하나의 산소로 나누어 진다. 산소와 수소에서는 물에 대한 느낌을 전혀 가질 수 없다. 얌전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이 모여 성난 군중이 되기도 하며, 도덕적인 개인이 만나 비도덕적인 사회를 만들어 낸다. 군중이나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의 특징은 사라져 버리고,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이 도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일은 구성원간에 서로 영향을 주며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밀스런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분석되고 정리된 자료로부터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지기(知己)에서 논의한 ‘상상하기’의 힘을 빌어 해석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가가 실제 일어난 일들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시인은 일어날 지도 모르는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역사가와 시인은 운율에 담아 말하느냐 운율 없이 말하느냐라는 관점에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난 일들’을 말하고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말한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을 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들이 창조한 세상을 읽어 내야 하는 독자들에게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창작자의 세상과는 다른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각기 다른 경험을 얻어낸다. 시나 소설 자체가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그것을 읽기 위해서도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상력이 문학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에게도 상상력은 필수적이다. 제한된 역사의 기록과 선조들이 남긴 몇 조각의 유물들을 가지고 그들의 삶과 죽음을 알아내려면, 그 조각들 간의 관계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관계는 거의 상상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물론 그렇게 얻어진 가설은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검증해 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기는 하다. 모든 사회과학도 마찬가지다. 아니 사회과학뿐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추론한다는 것이 비록 비논리적일 수 있지만,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세계를 들여다 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방법이 된다. 이를 통해 알려진 것과 보여주지 않은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분류를 위한 하나의 기술로 우리는 로직트리를 추천하였다. 많은 정보를 분류할 때, 대분류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하위 분류로 가지치기해 가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런 방법을 연역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연역적 논리란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특수한 것을 추론해내는 접근방법이다. 일반적인 것이니 무엇인가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만약 우리가 관찰한 대상들이 기존에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로직트리의 구조를 알 길이 없다. 그런 경우 분류라는 작업은 로직트리의 반대로 진행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대분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이 없으니 말이다.


우리가 관찰의 대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면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그다지 없다. 우선은 비슷한 것끼리 묶어 보는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면 거기서 어떤 패턴이 나타나고 유형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방법이 귀납적 추론이다. 개별적인 관찰사례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도출해 가는 것이 귀납적 사고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까지 본 까마귀가 모든 검다는 경험에서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지식을 도출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은 지식확장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식이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계에서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감이 있다. 반면 귀납적인 추론은 한정된 경험을 토대로 일반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즉 어느 날 갑자기 흰색 까마귀가 발견된다면 “까마귀는 검다”라는 일반화된 결론은 틀린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행착오를 가지면서 지식과 이론도 진화해 왔다.


대부분의 상상력은 귀납적인 사고의 형태로 진행된다. 인간은 패턴을 찾아내는 데 소질이 있기 때문이다. 한 두 가지의 경험에서 일종의 패턴을 찾아내고 그것을 일반화한다. 우리들이 차를 마시면서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귀납법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의 경험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소설가들은 그런 종류의 일을 하는 데 뛰어난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감동이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역사의 몇 개 안 되는 조각을 가지고, 역사물 시리즈를 제작할 수 있다. 대조영에 관한 역사의 기록은 몇 줄 되지 않는다. 이런 기록이 소설가를 만나면, 134회나 방영하는 대작이 만들어 진다. 상상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상상력이 실재와 조각난 정보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눈에 보이지도 귀로 들리지도 않는 것들을 아는 방법도 결국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자연계에는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가 없어 분명한 근거는 댈 수 없지만, 관찰된 효과로부터 숨어있는 것에 대해 추정할 수는 있다. 추정한다는 것은 결국 상상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보이지 않는 것뿐 아니라 너무 복잡해서 서로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현상도 우리의 상상력으로 인해 실체가 조금씩 들어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관찰이다. 초기의 과학지식은 적극적인 관찰을 통해 패턴을 발견하고 그것을 검증하면서 축적되어 갔다. 고도로 숙련된 사람들의 경우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감각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훈련과 경험에 의해 증가된 능력이다. 예를 들어 직물공장의 염색기술자는 평범한 사람에 비해 수 많은 색의 차이를 지적할 수 있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만들었던 대가들은 아마도 보통사람들의 몇 배에 달하는 소리에 대한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수많은 와인의 맛을 감각하고 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주파수는 16Hz에서 2만Hz사이로 한정되어 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파장의 빛을 가시광선이라고 하며 그러한 파장의 범위는 약 380nm(나노미터)에서 760nm사이이다. 이 범위의 양쪽 바깥에 위치한 적외선과 자외선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다. 대기를 통해서 지상에 도달하는 태양 복사의 광량은 가시광선 영역이 가장 많다고 한다. 아마도 눈의 감도가 이 부분에서 가장 높은 것은 그렇게 진화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은 이런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자신의 몸을 확장시켜서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는 현미경을 통해서 보기 시작하였고, 멀리 떨어진 사물이나 자연현상은 망원경의 발달로 가능해 졌다. 그러나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사용하더라도 결국은 우리의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감각기관뿐 아니라 우리의 뇌가 인지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크기 자체가 한정되어 있다. 시간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감각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느끼는 시간은 그야말로 시간이다. 시계를 보지 않더라도 대충 몇 시가 됐는지 알 수 있다. 하루 이틀 사흘 이런 날짜도 비교적 잘 인지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몇 주가 되었는지 몇 년이 흘렀는지는 감각보다는 머리로 알 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이 푸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긴 시간을 우리가 느낄 수 있을까?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우주의 수명인 137억년 정도일 것이다. 우주에서 이보다 더 긴 시간이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보다 더 긴 시간은 그냥 ‘무한대’ 또는 ‘영원히’라고 뭉그러뜨려서 말할 수 밖에 없다. 짧은 시간을 보자.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시간은 10^-15 초 이며, 원리적으로 가장 짧은 시간은 플랑크 시간이라고 해서 10^-43초라고 한다. 일상에서의 우리는 가장 짧은 시간을 그냥 ‘찰나’라고 애매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도 집중했을 때 우리가 감지하는 시간은 ‘초’ 단위다.


공간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은 어떤가? 쉽게 길이를 예로 들어 보자. 원자로부터 은하계까지의 크기를 한번에 상대적 크기를 비교하여 인식하기는 어렵다. 다행히 수학의 로그함수를 이용하면 하나의 직선으로 이처럼 넓은 범위의 크기를 한번에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하기는 하다. 일반적인 눈금에서 작은 눈금 하나는 배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1m 다음 눈금은 2m이니 한 배가 커진다는 말이다. 반면 로그 스케일로 만들어진 눈금의 하나는 10배를 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런 눈금 2개는 100배를 가리키게 된다. 인간의 입장에서 가장 친숙한 생명체는 대략 1m에서 10m 정도다. 인간이 주로 마주하는 것도 1m 단위의 크기다. 사람의 크기를 기준으로 우리는 건물의 크기나 다리의 길이를 인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름이 1만Km(10^7m)가 넘는 지구의 크기를 인식하기는 어렵다. 더 나아가 지구의 109배(10^9m)정도 되는 태양, 초속 30만km로 1년을 가야 되는 1광년의 크기, 더 나아가 인간이 알고 있는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한 퀘이사까지의 거리를 우리 인간이 감지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렇게 구체적인 수치를 제공해 준다 해도 우리의 상상력 없이는 인식할 수 없다.


작은 쪽으로 가보자.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의 크기는 다양하지만 보통 10^-6m 즉 1 마이크로 미터 정도의 크기다. 박테리아도 그만한 크기쯤 될 것이다. 이 정도 크기만 해도 정밀하게 비교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 나노는 10억 분의 1m를 크기다. 즉 10^-9m라는 말이다. 이 크기를 더 짤라 들어가서 대략 10^-10m의 크기 정도에 가면 원자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나노는 우리가 실제로 자를 수 있는 최소의 크기가 된다. 더 들어가면 원자 크기가 되어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물질을 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원자를 더 짤라 내어 10^-15m쯤 가야 원자핵 그리고 전자 양성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론상으로 크기를 더 작게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도 플랑크 길이가 있어 대략 10^-36m보다 작은 것은 알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 정도쯤 가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온도를 아무리 낮추어도 절대온도인 -273도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것과 아무리 빨라도 빛의 속도를 능가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이런 정도의 수치를 만나면 우리는 마냥 상상의 날개를 펼 수 밖에는 없다.


차원으로 들어가면 더 자연스럽지 못하다. 우리가 인식하는 공간은 3차원이다. 이미 알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더해 한 차원만 높여도 우리가 이해하고 또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만만하지 않다. 자기가 사는 차원보다 높은 차원은 생각하거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차원의 세계에 사는 선들이 있다고 하자. 여기에 2차원의 면이 들어온다면 선들에게 면은 어떻게 보일까? 어떻게 해도 선으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면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진다. 2차원의 세계에 3차원의 입체가 들어오면, 입체는 보이지 않고 면만 보일 것이다. 단 면의 면적이 일정하지 않고 불확정적으로 보일 것이다. 입체의 모든 면이 똑같지 않다면, 움직임에 따라 길이나 면적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면의 세계에서 입체의 존재는 늘 변하는 불확실한 존재가 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잘 이해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런 이유로 우리가 시공간을 통합한 상대성원리나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론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결국 우리의 상상력 없이는 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삼차원의 세계에서 살아온 우리의 뇌에게 세상은 사차원이라고 속여 먹기 전에는 그렇다. 그런 거짓말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상상력을 증대시키는 좋은 방법으로 관찰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언급했던 감정이입이 있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 사람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생각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입장으로 빠져 들어가 역사적 행위와 관련된 동기나 관점을 파악하고, 그들의 감정을 함께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도 이와 같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민물고기를 연구하는 사람은 가끔 자신이 민물고기가 되는 상상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내가 만약 민물고기라면 점점 나빠지는 수질을 피해, 그리고 외래에서 수입돼온 난폭한 포식자를 피해 어디로 갈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어야 한다.


상상력이 발휘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일종의 가정법이다. 이 가정법을 ‘셈치기’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뭐뭐 한 셈치자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에서 자신은 어릴 적 “셈치고 놀이’를 즐겨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녀는 그런 놀이를 <소공녀>를 읽다 발견했단다. 기억할 지 모르겠지만, <소공녀>의 주인공 사라는 부자인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졸지에 다락방으로 쫓겨난다. 하지만 사라는 그 곳에서 늘 ‘셈치고 놀이’로 여전히 공주로 살아간다. 친구를 자신의 더러운 방으로 초대한 후 “마룻바닥에는 두텁고 부드러운 인도에서 생산된 비로드를 깐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저쪽 구석에는 푹신푹신한 긴 의자를 둔다고 하자.” 이것이 사라의 ‘셈치고 놀이(Make Believe Play)’다. 아이들의 가정법적 상황을 이용한 놀이가 사실은 과학의 연구에도 사용되는 생각의 방법이다. 우리는 그런 방법을 가정이라고 부르며 가정은 다시 가설이 만들어지는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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