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3 교시 인지과학 시간: 기억의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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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이첵, 2004>의 주인공 마이클 제닝스(벤 애플릭)는 자신의 기억을 지우는 데 익숙하다. 천재 공학자인 마이클 제닝스는 각종 회사의 일급 프로젝트를 수행한 후 기밀유지를 위해 그와 관련한 기억을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한 회사를 위해 미래를 예측하는 기계를 개발한 후 최근 3년 동안의 기억을 없애는 큰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기억 제거 수술 후 깨어난 그에게 남겨진 것은 계약 때 받기로 한 44억 달러가 아니라 핀, 못, 동전, 신문지에서 오려낸 단어 맞추기 퍼즐 등 열아홉 개의 잡다한 물건들이 담긴 봉투 뿐이다. 제닝스는 그의 연인이며 생물학자인 레이첼(우마 서먼)의 도움을 받아가며 어렴풋한 기억과 봉투 속의 물건들을 기초로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의 머리에서 특정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사용하는 기억 지우기 방법은 CT를 찍듯이 사람의 머리를 기계 속에 고정한 후 뇌의 기억을 영상화 하여 그 영상과 관련된 세포를 파괴하는 식이다. 우리의 신경세포는 언급하였듯이 네트워크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기억이 세포 하나하나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세포들이 회로를 구성하며 기억을 만들어 간다. 따라서 한 개의 세포를 파괴한다고 어떤 특정한 기억을 없앨 수는 없다. 최근 3년 동안의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 보인다. 기억은 감시 카메라의 테이프처럼 시간 별로 구분되어 차곡차곡 저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인간두뇌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기억이 조직화되는 방식에 있다. 사실 생물체나 컴퓨터가 가지는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정보를 어떻게 저장하고 어떻게 다시 살려내느냐?”라고 할 수 있다. 그 정보가 바로 기억이다. 컴퓨터는 기억 하나하나에 각각 특정한 주소를 부여하여 저장하고 또 찾아낸다. 반면 사람의 기억방식은 네트워크 형태의 회로에 의한 것으로, 정보간의 연상을 이용하여 끄집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람에게 있어 기억에 관한 주소는 서로 연결된 기억이 알려주고 있는 식이다. 일종의 연상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의미상 연관관계가 형성되고 나면 더 잘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더 쉽게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기억들간에 서로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의 기억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의 질문은 따라서 어떻게 우리의 기억장치에 기억시킬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되며, 그 답은 네트워크 구조로 되어 있는 뇌세포 망과 연상에 의한 기억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뇌의 시냅스가 네트워크의 모습을 가지고 있듯이, 기억 또한 서로 관련된 매듭 즉 노드와 링크로 얽혀진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의 형태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개별 정보를 하나의 노드라고 할 때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끼리는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반면, 느슨한 관계를 갖는 것은 몇 단계에 걸쳐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면 무엇보다 그 생각과 연관이 밀접한, 즉 가까이 연결된 노드들이 먼저 떠오르게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지피지기’하면 어떤 사람은 ‘손자병법’을 먼저 머리에 떠오를지 모른다. 그리고 계속해서 ‘전쟁’, ‘육이오 전쟁’, ‘중공군’, 그리고 최근 여행했던 중국의 ‘하얼빈’이 떠오를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지피지기’라는 생각에 ‘손자병법’ 그리고 이어서 ‘전략’, ‘경영’, ‘우리회사’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기억력을 강화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에 주소를 부여하되, 그 주소가 가능한 체계적이며 다양한 주소를 가져 촘촘한 네트워크를 가지도록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 자연스럽게 이미 기억하고 있는 단어와 연결된다면 바로 그 단어가 새로운 정보의 주소가 될 수 있다. 만약 새롭게 기억해야 할 대상과 연관되는 기존 지식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 억지로라도 의미를 부여하거나, 기존 알고 있는 단어를 고의로 왜곡하여 암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실제로 우리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염색체 끝부분에 위치한 ‘텔로미어’라는 유전자는 우리의 수명과 관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전자를 “젤로 미워”라는 의미를 부여해 기억해 둘 수도 있다. 무엇인가 기억을 하기 위해 또 주소를 암기해야 하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뇌가 그렇게 작동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즉 저장장소는 무한할 정도로 크지만, 한번에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뇌가 그렇게 발달되어 있다.


기억의 주소가 체계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조직화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억에 있어 조직화란 각 정보 사이의 관계에 의거해서 더 큰 단위나 덩어리로 묶어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금, 루비, 은, 구리, 사파이어, 납, 백금, 알루미늄, 다이아몬드 등 9개의 광물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고 해보자. 아무 의미 없이 이 광물을 한번에 기억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귀금속으로는 금, 은, 백금, 일반금속에 구리, 알루미늄, 납, 그리고 보석에 루비, 다이아몬드, 사파이어라고 정리하여 암기 한다면 보다 쉽게 암기할 수 있다. 1976년 바우어G. H. Bower라는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자는 실제로 이 사례를 가지고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해 보았다. 실험 결과, 광물 이름을 특별한 맥락 없이 불러준 경우 대부분의 참가자가 약 15% 정도밖에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의미 있는 그룹으로 나누어 제시한 경우에는 평균 70% 정도를 기억해냈다.

https://medium.com/on-breaking-the-mold/the-mind-palace-a-place-for-everything-753688facc6d The Mind Palace: A Place for Everything


16 세기 예수회 신부이며 당시의 동서양 문명을 아우르는 유일한 지식인이며 최초의 세계인이라 불리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보이지 않는 ‘기억의 궁전(Memory Palace/Method OF Loci)’이라는 기억술을 중국인에게 전했다고 한다. 머릿속에 상상으로 거대한 기억의 궁전을 세우고 각 방에 이름을 붙인 뒤 그 방에 해당하는 정보를 채워 놓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제 궁전의 각 방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는 기억에 의해서 호출될 때까지 그 곳에 머물게 된다. 이런 방법은 잘 정리된 자신만의 책장이나 스스로 저술한 서적을 가지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의 대상에 다양한 주소가 있는 것이 기억에 유리한 것처럼 보인다. 수 많은 링크가 네트워크를 강화하듯이 말이다. 시청각 교육의 중요성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단순히 글자로 되어 있는 정보보다는 그림과 소리가 함께 기억된다면 더 생생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며, 당연히 찾아내기도 쉽다. 마테오 리치와 같은 기억술의 대가들은 정보를 이미지화하라고 강조한다. 그 이미지가 전체를 하나로 기억할 수 있는 큰 단위이기도 하지만, 기억의 대상을 찾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주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복은 분명히 기억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더 강화된 기억 네트워크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뇌에 만들어지는 네트워크 회로는 새로운 공항으로 촘촘해지는 비행망처럼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낼 때마다 합이 아니라 제곱하는 양으로 증가하면서 더욱 밀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뇌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한 사람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를 꼽는다. 다양한 분야 모두에서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 내어 후세에 물려 주었기 때문이다. <다빈치처럼 생각하기>의 저자 마이클 겔브Michael Celb는 그의 능력은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한가지 아이디어를 다양한 분야와 엮어내는 습관에서 나온 것이라고 진단한다.


우리 뇌의 장기기억 장치에 저장된 정보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에게 망각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망각이 없을 리 없다. 망각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면 말이다. 망각은 어쩌면 우리에게 축복의 능력이다. 부끄럽고 잘못한 일들을 늘 기억하고 다닌다면, 누구라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아니 슬프고 아픈 기억들을 오랫동안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런 일이다. 다행스럽게 우리에게는 망각의 능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축복은 우리에게 반복적인 학습을 요구한다. 망각곡선이라는 개념을 제안한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받아들인 정보는 10분 후부터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는 실험을 통해 우리의 기억은 4시간까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하루 뒤에는 70%가 한 달 뒤에는 80%가 사라진다고 보고하고 있다.

대부분의 정보가 단기기억에 머물다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망각으로부터 기억을 지켜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복습이며, 복습에 있어서 그 주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에빙 하우스에 의하면 10분 후에 복습하면 1일 동안 기억되고, 다시 1일 후 복습하면 1주일 동안, 1주일 후 복습하면 1달 동안, 1달 후 복습하면 6개월 이상 기억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실험은 무의미한 정보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만약에 글자나 숫자에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다면 더 잘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 이해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식은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가속도가 붙는다. 하나의 지식을 익히고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정보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정보와 함께 그 정보를 기억하는 방법도 함께 기억하게 된다. 하나를 습득하면 다른 것에 대한 학습 능력도 익힐 수 있다는 말이다. 기존의 지식이 배경지식이 되어 새로 받아들이는 지식을 보다 효율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단순히 저장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인 지식을 서로 연결하여 새로운 지식이나 지혜를 얻게 된다. 실제로 우리 뇌는 매일 만나는 새로운 정보들을 새롭게 분류할 뿐 아니라, 그런 자극을 통해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들이 재배열된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해결하고 싶을 때에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정보들간의 연결고리를 조합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저장하고 있는 ‘생각의 연결’을 끊임없이 바꿔가면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서로 크게 연관이 없는 것들까지 조합해 내어 놀랄 만큼 재미있고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창조성이다. 우리의 삶이 네트워크이듯이 우리가 기억하는 지식도 잘 연결된 네트워크로 구성될 때 최대한의 능력이 만들어 지고 있는 셈이다. .


뇌에 위치하고 있는 해마라는 기관은 단기기억을 분류한 후 장기기억으로 바꾸는 기능을 맡고 있다. 아침 출근길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을 보는 순간 그들의 잔상은 시각 중추인 후두엽에 순간 기억으로 잠시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 기억은 금방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여 관찰한 사람에 대한 기억은 나름대로 중요한 정보라고 인식해 ‘해마’에 있는 기억 세포들에 의해 기억된다. 해마에 저장된 기억 역시 단기적인 것이다. 그런 기억들 중 정말 중요한 존재들은 해마에 의해 재분류되어 신피질로 옮겨져 장기기억으로 저장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마를 ‘기억의 공장’이라고 부른다. 이 해마 옆에는 편도체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 편도체는 ‘좋고 싫음’을 판단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 좋고 싫다는 감정의 정도에 따라 편도체가 바로 옆에 위치한 해마를 자극한다. 당연히 우리가 흥미를 가지는 것을 더 잘 기억하고, 생존과 관계되는 강한 자극일수록 더 잘 기억할 수 밖에 없다. 즉 우리의 뇌에게 지금 받아들인 지식이 우리의 생존과 성장에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을 때 더 잘 기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슬프고 즐거웠던 경험을 더 잘 기억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인정할 수 있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쉽게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억한다. 그 나이에 정보는 모두 새롭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암기하여야 할 동기나 목적이 분명한 경우 더 잘 기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학창시절 영화 속의 대사나 소설의 문구를 특별히 잘 기억하는 친구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특히 로맨틱한 대사를 외워두었다가 필요에 따라 즉시 활용하곤 한다. 아니 가끔은 그 대사가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써먹곤 했는데, 결과는 늘 성공하는 듯했다. 우리들의 친구는 <러브스토리>의 명대사인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등을 줄줄이 외고 다녔다.


사용할 목적이 분명했고 그로 인해 동기부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놀라운 기억력을 과시하곤 했다.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기억 저장장치에 집어 넣어야 더 잘 기억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기억력 부문에서 세계 기네스 기록을 보유한 에란 카츠Eran Katz는 기억력을 증대하려면 “어떤 내용을 학습할 때 먼저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더 나아가 “이것을 공부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이 따르는지도 생각하라”고 강조한다. 결국 기억력을 증대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동기 부여’라는 말이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신문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심심하거나 아무런 의미 없이 지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그렇게 얻어낸 지식이 오래갈 리가 없다. 학습에 대한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OECD의 4가지 지식 유형에 중요한 지식종류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해 학습해야 하는 지를 아는 것’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이를 우리는 ‘목적을 아는 지식(Know-for-What)’라고 부를 만하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지식이 무엇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지를 알아야, 한 줄의 정보가 지식이 되고 그런 지식은 피라미드의 더 위로 올라가 지혜가 될 채비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를 기억해 두는 일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다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까지 관심을 가지고 암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들 중 일부는 과거의 기억들과 관련지어져 우리들의 데이터베이스를 풍족하게 할 것이며, 그런 기억들이 서로 연결되어 우리에게 더 창의적인 생각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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