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합리적이고 싶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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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깨닫게 되었다. 나의 실패는 모두 나의 탓이다. 내가 나 자신의 최대의 적이고 비참한 운명의 원인이다.” ~ 나폴레옹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1세로서 프랑스의 보나파르트 왕가의 첫 번째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1805년 12월2일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연합군을 격파하고 다음해 유럽의 열강 프로이센의 베를린을 점령하면서 명실상부 유럽의 주인이 된다.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 이후 처음으로 거의 유럽 전역을 지배하게 된 인물이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러시아뿐이었다. 하지만 이 러시아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은 끝내 나폴레옹 자신을 무너뜨리고 만다. 나폴레옹 군의 핵심역량 역시 칭기즈칸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속도였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은 군대의 휴대품을 경감하고 가능한 식량을 적지에서 조달하는 방법을 동원하였다. 결과적으로 당시 적군의 행군속도는 1분에 70보인데 비해 프랑스 군의 속도는 1분에 120보 정도로 빨라지고 기동력이라는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까지의 진군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프랑스에서 모스크바까지의 보급선 길이가 과거 나폴레옹 군이 경험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호밀의 수확이 부족하자 식량의 현지 조달도 어려워졌다.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던 나폴레옹도 기동력에 필수적인 보급의 문제에서 실수를 범한 것이다. 사실 러시아 원정 자체가 프랑스 군의 강점인 기동력을 살릴 수 없는 전쟁이었다. 나폴레옹 자신도 “어쩌면 모스크바로 가는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군”이라면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허기는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대군을 이끌고 처음 가는 머나먼 원정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며, 적이 후퇴하면서 자신들의 식량과 숙소를 불태우고 떠날지는 또 어떻게 예상했겠는가?


우리가 만나는 세상이라는 것이 만만하지 않다. 변수가 너무 많은데다가 그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기 시작하면 그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해 내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세상을 우리는 복잡계라고 부른다. 1+1이 2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될 수 있다는 시너지도 결국은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둘이 아니라 셋 이상이 모이면 네트워크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구성원이 많아지면 생산성이 높아지는 만큼 복잡성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복잡해진다. 그런 복잡한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그런 인간을 경제학에서는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부른다. 경제학이 가정하는 합리적 인간은 우리가 일상에서 이야기하는 합리성과는 차이가 있다. 경제학의 합리성은 손익의 계산이 정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합리성은 인간의 이기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경제학의 인간은 손해와 이익이 되는 측면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또 그를 계산하는 데 있어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누군들 이런 합리성을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인간은 원하는 만큼 합리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합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싶은 인간’인 셈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합리적이지 못할까?

우리의 뇌가 가지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책으로 이야기하면 미국 의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 2,000만권 이상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이런 기억용량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우리 뇌가 생각하는 능력은 정말 보잘것없는 정도다. 특히 우리의 연산능력은 더 형편없다. 요즘 PC(데스크 탑 컴퓨터)의 생각속도는 1기가 헤르츠가 넘지만, 인간의 생각의 속도는 10메가 헤르츠 정도다. 수치로만 보면 PC가 우리의 생각속도보다 최소한 100배는 빠른 셈이다.


사실 생각하는 속도의 차이가 100배가 아니라 2배만 차이가 나더라도 웬만해서 극복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다. 우연이라도 이겨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인간은 두 개 이상의 요소를 가지고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도, 아주 성능이 좋지 않은 컴퓨터에 비해서도 턱없이 부족한 정보처리 능력을 보여준다. 거기다가 수시로 계산에 실수하기도 한다.


더구나 우리가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면, 이 장기기억에서 필요한 것을 떠올려 단기기억으로 가져와야 한다. 컴퓨터에게 어떤 작업을 명령하려면 처리해야 할 데이터를 지정하여 RAM으로 가져와 처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 이 순간 우리가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이렇게 떠올린 몇 가지 정보를 결합한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의 단기기억을 숫자로 이야기 하면 7에서 더하기 빼기 2 정도의 정보뭉치 정도다. 천재소리를 듣는다면 한번에 기억할 수 있는 정보뭉치가 9개 정도 된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정도의 능력으로 우리의 복잡한 삶을 영위하고 또 필요한 판단을 해내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에게 무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내가 낯설까>의 저자 티모시 윌슨은 우리의 무의식이 전체 생각의 99%를 넘는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우리 삶의 대부분은 무의식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도움으로 우리는 의식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무의식이던 의식이던 우리의 기억은 다른 복잡계와 마찬가지로 네트워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이 네트워크의 고리를 연결해 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 기억 속에 어떤 단어 하나를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단어와 연결된 단어들을 줄이어 연상하며 생각한다.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연결고리가 만들어 지기도 한다.


우리가 책을 읽든 아니면 무슨 말을 듣든 불현듯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면, 반드시 그 단어를 떠오르게 한 어떤 자극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람 소리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감동적인 스토리가 될 수도 있다. 여하튼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연상작용에 의해 연결된 정보를 가져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한 번에 떠올릴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무엇을 급하게 판단하고자 할 때는 모든 변수를 따지기 보다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몇 가지 단순한 변수를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행하게 된다.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효율성을 위해 우리의 생각이 진화해온 결과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생각은 정확성보다는 효율성을 우선한다는 말이다.


이런 우리의 생각의 방법과 약점을 이해한다면 최근 들어 행동경제학이라는 경제학의 한 지류에서 이야기하는 비합리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심리학자나 행동경제학자들은 비합리성의 유형을 다양하게 열거하고 또 설명하고 있지만, 단 한 마디로 설명해야 한다면 우리의 생각은 앵커링을 통해 생각의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말로는 ‘닻내리기’다. 닻은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바다 밑으로 무거운 것을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의 일성에서의 의미는 간단하다. 고스톱을 치면서 자신이 흔든 것을 잊지 않기 위해 화투 한 장을 뒤집어 놓았다면, 그 화투를 앵커로 해서 기억을 해내게 된다.

앵커링이란 결국 우리가 처음 만난 단어나 이미지 등을 생각의 허브로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지난 졸저 <지식의 재구성>은 그런 생각의 오류를 다양하게 정리해 두었지만, 이 역시 모두 앵커링에 의한 생각으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정관념이니 편향확증이니 하는 생각의 비합리성 모두 앵커링 효과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정보를 기초로 새로운 정보를 해석하게 되어 있다. 기존의 정보에 집착하여 그 정보에 완전히 고정된 앵커링을 하고 있다면 고정관념이 되고, 자신에게 편리한 것을 선택적으로 골라 앵커링을 하면 편향확증이다.


일반적으로 편향 확증이란 선택적 사고를 의미한다. 우리의 판단은 이미 알고 있거나 무의식에 저장된 가장 극적이거나 최근에 경험한 사건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인간의 의사결정 시스템이 그렇게 진화되어 온 것이다. 이처럼 선입견을 갖게 되면 처음에 생각했던 견해나 느낌을 뒷받침해 줄 정보만 받아들이고 그에 반하는 정보를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곧잘 합리적이 가지는 정확성을 잃어 버린다. 반면 그런 과정을 통해 빠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셈이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새로운 현상을 해석하려는 고정관념 역시 생각의 효율성을 위해 우리의 의식이 무의식에 많은 부분을 위임한 탓이기도 하다. 고정관념의 함정이란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을 말한다.

특히 우리는 자신의 위험과 관련된 단어나 현상을 회피하지만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긍정적인 앵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 역시 우리 모두가 모험심 보다 위험을 회피하려는 본성이 더 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기존의 정보를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무리의 움직임이나 의견을 바람직한 수준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측면도 있다. 이 역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이었거나 본능적인 사회성 때문일 수도 있다.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을 실제보다 더 강하게 인식한다는 점이다. 한 번의 위험한 상황이 생존과 관계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비합리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가지는 생각의 한계를 넘기 위한 합리적인 방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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