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영국이 중국 본토에서 벌인 <아편전쟁>의 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2차에 걸친 전투 그 자체는 모두 중국의 허무한 패배로 끝나고 만다. 서양은 과학기술과 문화 그리고 부(富)의 측면에서도 동양의 적수가 아니었다. 유럽 전체 면적을 다 합쳐도 현재 중국 한 개 국가의 면적보다도 작을 뿐 아니라 인구만해도 중국이 더 많다. 1820년 이후 영국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무역 흑자국이었다. 우리가 해오고 있는 전쟁이라는 최악의 경쟁에서도 서양은 동양과 비교하기 어렵다. 과거 이야기다. 1300년 초반까지만 해도 몽골군 단독으로 유럽을 휩쓸었으니 더 이상 논쟁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1840년대~1920년대 활동한 군사 일러스트레이터 리처드 심킨(Richard Simkin)이 그린 수채화 작품.
842년 7월 21일 청나라 (만주 정부) 를 패배시킨 영국 육군 제98 보병 연대(The 98th Regiment of Foot)
그런 상황이 언제부터 역전되고 말았다. 1400년대의 르네상스 그리고 1500년 대의 대항해와 신대륙발견, 1600년대 상인의 시대 그리고 1700년대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부도 축적할 수 있었다.
더구나 동양의 경우 전면적인 전쟁이 거의 없었던 반면 유럽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외부로는 투르크를 위시한 이슬람세력과 맞서고 내부에서는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서 싸우고, 국가간의 영토 싸움, 왕위 계승과 관련된 전쟁 그리고 내부로는 귀족파, 왕당파, 공화파로 나뉘어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역설적으로 이런 잦은 전쟁으로 무기가 발달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서양과 동양의 전력은 유럽 대륙 전역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을 지나고 나서는 완전히 역전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아편전쟁 전까지만 해도 서양은 중국의 잠재력이 두려워 건드릴 생각도 못했고, 중국은 아직도 자만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1840년 일어난 아편전쟁의 패배로 중국이 종이호랑이라는 것이 판명되면서 동양과 서양의 반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이 후 유럽은 우월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 대한 식민지 경쟁에 돌입하였으며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말았다.
내 안에 60만 대군을 기른다
동물의 세계에서 최고의 수컷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승부를 치러내야 한다. 승자가 된 후에도 경계심을 늦출 수 없다. 패배자들이 언제 다시 도전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패배자들도 생존의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만약 그대로 포기하고 만다면,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선점한 자 이미 강해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패자는 와신상담의 자세로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논의한 경쟁의 원리다. 패자는 승자가 되기 위해 승자의 배를 노력해야 다음의 경쟁을 기대할 수 있다. 패자뿐 아니라 승자도 미래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인 조건에 의해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연습벌레’를 이겨내기는 어려운 것이다. 승자는 대개 미래를 준비한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동물로부터 차별화되는 것은 ‘사회적 동물’, ‘감정의 동물’,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동물’이다. 다람쥐가 겨울을 위해 도토리를 자신의 구역에 묻어 두고, 동면을 앞둔 오소리가 체내의 지방을 늘리기 위해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 먹어 치우면서 살을 찌우기는 하지만, 인간처럼 미래의 소비를 위해 투자하고 마지막 승부를 위해 경쟁에서 고의로 져주거나, 경쟁대신 협력을 위한 협상과 계약을 하지는 않는다.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효과적이며 효율적인 방법이 학습이다. 그리고 학습이란 미래에 치러야 할 대가를 오늘 미리 지불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공부하고 훈련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은 아니다. 학습이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라면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많이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실행의 순간에 사용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쟁의 상태에 돌입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주 잘 훈련된 동작들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60만 군대는 자신이 근무하는 중에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전쟁을 위해 오늘도 같은 동작을 그리고 같은 전술을 반복해서 훈련하고 있다.
<성공 지능 successful intelligence>의 저자 스텐버그(Robert J. Sternberg)는 경쟁력을 성공지능지수라는 수치로 표현하고 싶어한다. 그가 말하는 성공지능지수(SQ: Success Quotient)는 분석적 능력, 창조적 능력 그리고 실천적 능력의 합이다. 물론 아직은 IQ 처럼 측정이 가능한 수치는 아니다. 다만 스텐버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성공지능지수가 높을수록 경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며, 그를 위해서는 생각의 능력과 실행의 능력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행능력이 강조되는 것은 실제로 경쟁이 막상 표면에 나타나고 전투가 시작되면 많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승리에 필요한 것은 기강과 가차없는 실행일 뿐이다. 우월함은 이미 누가 더 많은 훈련을 해왔는가에 의해 결정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훈련은 나의 무의식을 조정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운다. 가장 빨리 배우는 방법은 직접 해보는 것이다. 인류는 역사의 대부분을 글과 책이 없이 지냈다. 몸으로 체험하면서 배워왔다는 말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후각 청각 시각 미각 촉각이라는 오감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함께 기억하는 셈이니 그야말로 멀티미디어 학습인 셈이다.
우리의 생각은 사실 집중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정보를 놓치고 만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약점을 무의식이라는 또 다른 나의 능력으로 대처해 왔다.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소개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무의식이 전체 의식에 90%가 될 것이라 추정했다. 의식은 전체 인간의 의식에 해당하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다.
반면 <나는 내가 낯설다>의 저자 티모시 윌슨은 의식은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빙산 위에 조금 쌓여 있는 눈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수치는 의미가 없지만 99% 정도가 무의식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허긴 우리의 삶의 대부분을 무의식에 의존하고 있다. 실재로 무의식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 어렵기는 하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지식의 재구성>에서 무의식의 존재에 대한 다양한 예를 들었듯이 그 결과로 증명할 수 있다. 무의식은 의식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행동이나 생각이라는 결과를 무의식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으로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역으로 무의식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나타나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무의식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의식만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정말 바빠진다. 친구와 공놀이를 할 때도 몸의 각 부위에 대한 각도와 던질 때 투입할 힘에 대한 계산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테니스 스윙을 위해 매번 백 스윙의 크기와 손목의 각도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무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대충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하튼 무의식의 존재는 매우 축복된 것이다. 티모시 윌슨은 “우리에게 의식적인 마음만 있을 경우 이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티모시 윌슨의 표현처럼 의식과 무의식을 행정부의 조직에 비유해 보자. 의식은 행정부에 있어 대통령과 장관같이 고위 관료들이고, 무의식은 지방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하급관리들에 해당한다. 일상적인 업무는 주로 하급관리들이 담당하고 국가의 중대사나 미래에 대한 의사결정은 대통령과 관료들이 처리한다. 이처럼 우리의 뇌에서도 우리의 지각과 언어이해 같은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기능들은 무의식이 처리하고, 추론하고 분석하는 고차원적인 기능은 의식에서 하면 된다.
그렇다고 하급관리들이 알아서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늘 훈련시키고 교육을 시켜야만 한다. 그렇게 잘 훈련된 무의식만이 의식의 도움 없이도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훈련에 의해 경쟁력 있는 습관이 만들어 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훈련한다는 것은 무의식을 작동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의식적으로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빠른 실행에 있어서는 의식보다 무의식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만 번 반복하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인디언의 금언이 있다고 한다. 또 ‘1만 번의 법칙’이라는 것도 있다. 무엇이든 만 번을 반복하면 무엇이든 능히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조금 바꾸어 ‘1만 시간의 법칙’을 제시한 사람이 <아웃라이어>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이다. 언급하였듯이 이 책은 성공의 요인으로 운을 꼽는다. 그런데 그냥 운이 아니라 훈련의 기회를 가지게 되는 운이 중요하다. 그는 남보다 뛰어난 사람을 아웃라이어라고 하는데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땀 흘리는 훈련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훈련의 기회를 가지게 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승리를 얻어낸다는 것이다.
1 만 시간은 주일에 휴식을 취한다면 대략 5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8시간 정도를 몰입해서 훈련을 하는 시간이다. 만약 일상의 일을 하면서 훈련한다면 4시간씩 매일 10년을 해야 그 분야에 대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긴 시간이기는 하다. 하지만 지루한 시간이 될 것이라 속단하지는 말자. 처음에 진전이 없어 보이던 학습이나 훈련도 어느 시점이 지나면 임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말콤 글래드웰이 이전의 저서 <티핑 포인트>에서 이야기 하는 그 티핑 포인트로 자신의 실력이나 능력이 갑자기 좋아졌다고 느끼는 순간이 그때다. 컵에 물을 거의 다 채운 다음 이 컵에 물이 흘러 넘치지 않도록 한 방울씩 물을 부어 넣는다. 쉽게 넘치지 않겠지만, 결국 어느 순간 마지막 한 방울이 들어가면서 물은 흘러 넘치고 만다. 이 마지막 한 방울처럼 작은 변화가 갑자기 상황을 바꾸어놓는 이런 순간이 임계점이다.
99도의 물은 1도 차가 나는 100도의 물과 다르다. 1도만 올라가면 물은 기체로 상태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하지만 100도의 물도 99도까지 물을 데웠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때의 티핑 포인트는 작은 변화로 인해 예기치 못한 일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순간을 표현할 때 쓰인다.
더구나 그 시점이 지나면 실력은 산술급수적이 아니라 기아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우리가 언급한 네트워크의 효과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지식도 네트워크의 모양을 하고 있다. 데이터가 많아지면서 새로운 조합의 효과는 놀라운 속도로 늘어나게 되어있다. 학습의 효과도 늘어난다. 새로운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기존의 지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빨리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더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새로운 것을 더 빨리 배우게 된다. 만약 지식이 수확체증의 원인이라면 지식을 축적하면 할수록 성장은 더 빨라진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석수는 모난 돌의 뾰족한 부분부터 정(鋌)으로 다듬기 시작한다. 성격이 원만하지 못하거나 남과 다른 면이 많은 사람들이 공격을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속담이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 모난 사람도 있고, 또 둥근 사람도 있다.
우리 사회는 모난 사람을 질시하는 경향이 있다. 너무 나서기도 하지만 전체가 통일적으로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고 어린 사람들에게까지 둥근 돌이 되기를 강요해서는 창의력과 차별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젊고 어리다는 것은 아직 학습중인 세대를 가리킨다. 나이가 들어도 학습이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이고 또 실제로 그 대가를 치르며 살아가게 되어있다. 하지만 세상을 익혀가는 나이에는 모난 사람 둥근 사람 모두 실패와 성공이라는 경험을 통해 변해가게 되어 있다. 모난 사람은 이런저런 실패와 실수를 통해 조금씩 둥그래진다. 둥근 사람도 참았던 열정 또는 간혹 분노가 폭발하면서 조금은 모나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모양은 모든 사람이 다른 모양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둥근 돌과 모난 돌이 만나 경쟁하며 또 협력하며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과거로부터 학습을 통해 자신의 경쟁력을 더 높여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경쟁력은 혼자 산 속에서 갈고 닦은 그런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가면서 얻어낸 종합적 능력을 가리킨다. 우리가 경쟁의 기술이 곱이라고 한 것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경쟁에 예술은 그런 곱을 자신 만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 자신의 실패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기업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예를 든 애플과 ibm이 마이크로소프트에 뒤쳐져 진 것은 자신들의 핵심역량을 컴퓨터라는 하드웨어에 있다고 잘 못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장을 잘 못 읽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대로 주저 앉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어냈고 애플은 디자인이라는 핵심역량을 키워냈고 ibm은 소프트웨어와 서비스에서 핵심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들 기업은 다시 일등기업이 되었다.
우리는 과거에서 배운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것은 늘 오늘이다. 이 오늘은 우리가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날이다. 과거에서 배우고 기술을 익히지만 매번 같은 방법으로 승리를 낚아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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