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 각본, 감독,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레인맨 Rain Man>은 실제 인물 킴 픽Kim Peek을 모델로 하고 있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불리는 킴 픽은 실제로 1만권의 책을 암기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 킴 픽이 있다면 영국에는 다니엘 타멧Daniel Tamet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들이 2004년 미국의 솔트레이크 시티 시립도서관에서 만난다. 타멧이 자신을 소개하며 “저는 79년 1월 31일에 태어났어요”라고 말하자, 킴 픽이 “자네의 65살 생일날은 일요일이 되겠군. 내 생일은 51년 11월 11일이야”라고 대꾸한다. 그러자 타멧이 “당신에게는 태어난 날이 일요일이네요”라고 화답한다.
자폐를 앓는 사람들 중에는 천부적인 기억력이나 예술성을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뭐든 한번 보았다면 몽땅 다 외워버린다. 영화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이 그런 사람이다. 영화 <레인맨>은 자폐증의 형(더스틴 호프만)과 이기적인 동생(톰 크루즈)의 형제애를 그린 영화다. 이 형제의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300만 달러의 유산이 형에게 돌아가기로 된 것을 알고 동생은 자신이 ‘레인 맨’이라 부르곤 했던 형을 찾는다. 유산을 나누어 받기 위해서다. 그렇게 찾은 형이 자폐증 환자다. 하지만 어느 날 형이 한번 본 숫자는 모조리 외울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자, 라스베가스의 카지노로 달려가 블랙잭이라는 게임을 벌인다. 레인맨은 모든 카드의 숫자와 무늬를 암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승부는 뻔한 거다.
영국의 다니엘 타멧도 ‘브레인 맨’이라고 불리는 천재지만 그 역시 자폐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타멧이 자신의 생각을 담은 자서전 <브레인맨, 천국을 만나다>를 출간하였다. 아마도 그가 자폐증의 정신세계를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자신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고 있다.
“나는 말을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지도 않고 혼자서 줄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화 중에 잠시 숨을 돌린다거나 상대방에게 말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우리의 뇌는 매 순간 엄청난 정보를 받아들인다. 의식을 가지고 얻으려는 정보는 무의식이 받아들이는 정보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도 못 미친다.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Timothy Wison의 <나는 내가 낯설다>에 의하면 매 순간 우리의 오감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1천만 개에 달한다. 영화 한 편은 약 1기가 바이트의 CD 한두 장에 저장된다. 반면 우리가 단 하루 동안 겪은 일을 영상과 음향으로 만들어 컴퓨터에 저장한다면 쉽게 몇 십 기가바이트를 넘어설 것이다. 고성능 컴퓨터라 하더라도 우리 생활의 며칠만을 저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 우리가 살아온 일생을, 선택적이라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오래된 일상을 스스로 기억해 내지는 못하더라도, 무엇인가 연상되는 상황을 만나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을 보면 알 수 있다. 도대체 그 많은 정보들을 다 어디에 저장하고 있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뇌의 저장용량이 100Tb(테라 바이트)정도 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PC의 하드 디스크가 100기가(Giga) 이상이라고 하더라도, 기가가 10의 9승을 의미하고 테라기가 10의 12승인 만큼 우리의 용량이 1,000배는 크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 숫자는 충분한 과학적 근거가 있거나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계산방법을 가지고 있고 그 결과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100테라 즉 100조라는 숫자는 그런 주장들 가운데 하나를 임의로 선택한 숫자에 불과하다. 우리들의 뇌세포를 연결하는 시냅스가 100조정도이니 아주 엉터리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숫자의 함정에 빠질 이유는 없다. 단순히 상당한 용량이라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래도 현실성이 부족해 보인다면 그냥 보통사람의 기억용량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 미국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의 장서 수에 달하는 2,000만권의 책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의 일상을 모두 책으로 쓰고 또 자신이 일생 동안 읽은 책으로도 이곳을 가득 채우는 일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우리 뇌의 일부를 채우고 있을 뿐이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들인 정보도 만만치 않은 정도일 것이다. 학창 시절 우리가 공부한 지식과 정보만이라도 모두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만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그것의 아주 일부만 기억해 낼 뿐이다. 엄밀하게 이야기 하면 기억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지 못한다고 해야 한다. 실제로 인간에게는 망각이란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있는 파일을 지운다고 해도 데이터 자체가 삭제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물속에 넣어다고 데이터 자체가 삭제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드디스크의 데이터는 자기기록(磁氣記錄)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파일을 지운다 해도 파일 이름만 지워졌을 뿐이다.
우리의 장기기억 장치도 이와 유사해서,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단지 그 기억을 찾아 낼 수 있는 파일이름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뿐이다. 시험 문제지를 받아 든 순간 갑자기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정보들이 모두 망각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다시 책을 들추어 하나의 단어만 찾아내더라도 관련 내용이 줄줄이 떠오른다. 망각된 것이 아니라 인출에 실패한 것이라는 증거다.
우리는 보통 기억과 관련한 두 가지 함정 중 하나에 빠진다. 이외로 많은 사람들이 암기하는 것은 머리 나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이해만 하면 된다”고 고집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해한 지식이 포함하고 있는 중요한 단어를 암기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지식을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재미있는 조크를 듣고 박장대소했다고 하자. 우리는 분명히 그 조크의 내용을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그 조크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를 암기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우리 자신이 사용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지식이 그렇다.
이해를 통해 자연스럽게 몇몇 단어의 기억을 더 강화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이미 알고 있는 기억들에 한정될 뿐이다. 아니 무엇보다 필요할 때 기억을 해낼 수가 없다면, 그것의 유용성은 어디에 있겠는가? 기억력은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능력이다. 전문 지식도 모두는 아니라도 기억력에 의지해야만 한다. 자기 앞에 놓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축적된 기억에서 지혜를 꺼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인생이란 기억의 연속이며, 우리의 일상은 기억에 의해 그 효율성과 뛰어남이 나타난다. 사람들과의 만남 역시 기억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 대화 도중에 거침없이 시를 낭송하거나 영화나 소설의 대사를 인용하는 사람들같이 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암기가 필요하다.
그런 것을 인정하면서도 기억을 위해 암기하는 과정을 빼먹는 함정에 빠진다. 이런 함정에 빠진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 수가 많고 함정에 빠진 이유도 다양하다. 본인의 기억력이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일찌감치 암기하는 것을 포기한 나 같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또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면 혼란스러워 다 기억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유형의 사람들도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의 기억장치는 2,000만권의 책을 담을 수 있을 정도다. “너무 많은 것은 기억할 수 없다”는 말은 우리의 기억능력에 적용되지 않는다. 많은 것을 기억할수록 오히려 서로가 기억을 강화시켜 새롭고 창조적인 지식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또 다른 기억에 관한 함정은 무작정 반복하여 암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이다. 기억에 있어서 반복이란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다. 반복을 통해 인간의 뇌가 더 기억을 잘 할 수 있다는 증거는 충분하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을 단편적이며 독립적으로 저장할 수 밖에 없다. 그야말로 각 단어를 의미 없는 하나의 정보로 기억하였다가 다시 하나씩 끄집어내야 한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경험이나 이야기로 기억할 수 있어야 기억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커질 수 밖에 없다.
기억을 잘하기 위해 해야 할 일도 결국 조직화이다. 정리하는 것 자체가 조직화이며, 비록 그것이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이지만, 역설적으로 시간을 아끼는 작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찾는 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우리 인생의 절반은 찾는데 소비한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정말 많은 시간을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줄의 글을 쓰기 위해 몇 시간이고 자료를 찾아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유용한 도구가 있고,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정보를 정리해 놓았기에 이 정도다. 누구의 도움이던 정리가 되지 않고서는 어떤 일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인간의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뇌세포가 있는데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기억, 언어, 감정 같은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뇌에서의 연결선은 바로 시냅스라고 부르는 신경정보 전달 경로다. 하나의 신경세포는 5,000에서 10,000개의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은 우리의 뇌도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네트워크 구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1949년 캐나다 심리학자인 헵(Donald Hebb)은 ‘기억이란 뇌세포끼리의 연결부위인 시냅스가 강화되어서 여러 개의 뇌세포가 활성화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 후 다른 학자들의 연이은 실험이 헵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어떤 정보를 기억하기 위해서 뇌세포가 새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뇌세포와 뇌세포의 연결이 강화되면서 네트워크가 형성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세상에 태어나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때마다 우리의 뇌세포를 연결하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떠오른다”는 표현을 연상해보라. <브레인맨, 천국을 만나다>의 다니엘 타멧이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쉬지 않고 계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 직하다. 자신이 보고 읽은 것들을 워낙 많이 기억하고 있어서, 대화 도중에 어떤 단어나 이름을 들으면 도미노처럼 연상작용이 일어나 새로운 단어가 꼬리를 물고 떠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기억을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낸다면 아마도 네트워크의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기억에 하나의 꼬리가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뇌세포의 네트워크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네트워크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전세계의 도시가 비행기의 항로로 연결된 모습을 상상해 보면 된다. 대부분의 도시는 이제 최소 하나 이상의 도시와 연결되어 있고, 뉴욕이나 파리가 같은 대도시는 대부분의 대도시와 링크되어 있다.
더구나 우리의 뇌세포는 생각을 할 때마다 새롭게 연결이 구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봉균 서울대 교수의 기억제어 연구팀이 과학지 <사이언스, 2008. 2. 29>에 제출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우리는 옛 일을 떠올릴 때마다 ‘기억의 집’을 허물어다가 다시 짓는 일을 반복한다고 한다. 과거를 회상할 때 옛 기억이 저장된 장소인 시냅스의 연결망이 허물어졌다가 다시 구성된다는 말이다.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과거의 기억이 최신 기억에 의해 재조직화가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항공망이 늘 새로운 항로로 복잡해지고, 교류가 많은 도시간의 항로는 점차 강하게 연결되는 현상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세포, 생각, 인간관계, 자연, 우주가 이와 유사한 모습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만나는 복잡한 세상이 모두 이런 형태라면 하나를 이해함으로써 다른 복잡함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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