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서로 연결되더라
기도 중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쓰여진 것이 신약성경 27권이다.
위의 성경구절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교만한 자는 오히려 낮아질 것이고 겸손한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All Scripture[1]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2],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 디모데후서 3:16)”라는 표현에도 나타나듯이, 성경에서 우리는 마음의 양식이 되는 많은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그런 가르침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20권째 성경인 잠언은 지혜의 중요성을 내세우지만 그만큼 겸손함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한결같이 겸손해지라고 가르치셨다. 야고보서에는“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God opposes[3] the proud but gives grace to the humble. – 야고보서 4:6에는)” 베드로전서 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Humble yourselves, therefore, under God’s mighty hand, that he may lift you up in due[4] time. – 베드로전서 5:6)”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5] Gospels)이라고 부른다. 예수의 사역과 말씀을 거의 같은 시각(共觀)으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베낀 것처럼 일치하기도 하지만 크고 작은 차이가 발견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who are poor)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가 복되다고 표현하고 있다. 번역이 달리 된 것이 아니라 원래 구절이 다르다. 그렇다면 원래 예수가 말씀하시려는 의도는 물질적인 가난함이 아니라 교만하지 않은 마음을 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바로 겸손한 자가 되어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는가?
[1] 성서, 경전 [2] rebuke 비난하다, 꾸짖다 [3] 반대하다, 이의를 제기하다, [4] 지불 기일이 된, 정당한, 도착할 예정인 [5] 개요의, 대의의, 같은 관점의 여러 현상을 고찰하는, 공관(共觀) 복음서의
앞의 두 장에서 명사절과 부사절을 만들어 문장을 연결하는 방법을 정리해 보았다. 한 문장은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만들어 진다. 명사절과 부사절이 있다면 형용사절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형용사절 역시 그 자체가 주어와 동사를 포함하고 있는 절이다. 따라서 길어질 수 밖에 없다. 길고 복잡한 형용사는 영어의 제 3원칙에 따라 명사의 뒤에 와야만 한다. 영어 문법책에는 이런 용법을 관계대명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관계대명사라는 문법적 해석 없이도 우리의 단순함의 원칙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법이라는 말이다.
성경구절에서 그 예를 찾아보자.
The one who received the seed that fell on good soil is the man who hears the word and understands it. He produces a crop, yielding a hundred, sixty or thirty times what was sown[1].”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 마태복음 13:23)
위의 첫 구절을 줄이면 “The one is the man.”이 된다. 그런데 the one이 무엇이냐 하면 ‘씨앗을 받은 사람(who received the seed)’이라고 설명해 준다. 그리고 the man은 ‘말씀을 듣고 이해한 사람(who hears the word and understands it)’이다. 씨앗을 받은 사람은 말씀을 이해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아무 씨앗이 아니라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the seed that fell on good soil)’을 받은 사람이다. 결국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을 받은 사람은 말씀을 이해한 남자라는 이야기다.
위의 표현 역시 간단한 단어를 먼저 말하고 뒤에서 설명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문장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형용사절의 사용에는 영어의 3 원칙이 적용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조금 문법적으로 분석해 보면 관계대명사는 두 문장을 하나로 연결하는 접속사의 역할과 대명사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없이 긴 형용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지만 단순화의 원칙에 따라 긴 형용사가 뒤로 간다고 정리해버리면 간단하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We speak of God’s secret wisdom, a wisdom that has been hidden.
위의 표현에 나오는 ‘a wisdom that has been hidden’은 ‘숨겨져 왔던 비밀’이라고 해석된다. 이 말을 “a wisdom, that has been hidden”이라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자. 우리말로 하면 “지혜, 그것은 숨겨져 있다.”는 말이다. 즉 that이 바로 wisdom을 가리키며 대명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관계대명사는 바로 대명사다. 그런 대명사로 수식하는 문장과 수식을 받는 단어를 연결하는 경우 관계대명사가 된다.
위의 예처럼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 모두 that이 wisdom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 wisdom이라는 말을 반복할 필요가 없어진다. 다시 말해 중복되는 표현을 줄이고 싶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원래의 성경구절을 관계대명사의 용법으로 줄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을 만들 수 있다.
We speak of God’s secret wisdom that has been hidden.
관계대명사를 사용한 문장은 반복되는 명사 하나를 줄이고 대명사(위의 예문인 경우 that)으로 대체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하튼 선행사가 사람이라면 관계대명사로 who, 사물이나 동물이라면 which를 사용한다. 반면 위의 구절에 사용된 that은 사람, 동물, 사물 모든 선행사와 함께 쓸 수 있다. 특히 선행사가 최상급, 서수, the very, the only, the same, all, every, any, no 등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에는 보통 that을 관계대명사로 쓴다.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 마태복음 4:4)
Do not work for food that spoils, but for food that endures[2] to eternal life, which the Son of Man will give you. On him God the Father has placed his seal[3] of approval.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 요한복음 6:26~27)
반면 관계대명사로 쓰는 What은 단어 자체에 선행사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the thing which∼」「anything which∼」또는 「all that∼」로 바꾸어 쓸 수 있다. whoever, whomever, whatever 역시 선행사를 포함하고 있는 관계대명사이다.
우리가 예문으로 사용한 다음의 성경구절의 whoever는 ‘man who’와 같이 적절한 선행사가 있는 관계대명사로 바꾸어 쓸 수 있다는 말이다.
For whoever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whoever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For a man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a man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특별히 장소(the place), 이유(the reason), 방법(the way), 시간 (the time, the day, the week, the month, the year)이 선행사인 경우 각각 where, why, how, when을 관계대명사의 용법처럼 사용할 수 있다.
영어문법 책에는 이들을 관계부사라고 부른다. 우리의 문장 형식에서 장소, 이유, 방법, 시간 즉 어디서? 왜? 어떻게? 언제?는 부사전용지역에 위치하는 단어들임으로 이해가 되는 용어이지만, 우리는 그냥 관계대명사와 같다고 생각해 두자. 왜냐하면 where, why, how, when 등도 앞에 나온 선행사를 가리키는 대명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when 은 at[on, in] which, where 는 in[on, at] which, why는 for which, how는 the way in which 또는 the way that 과 같이 관계부사를 관계대명사의 표현으로 바꾸어 쓸 수 있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선행사 | 관계 부사 | 관계대명사 |
장소 (the place) | Where | at[on, in] which |
이유 (the reason) | Why | in[on, at] which |
방법 (the way) 선행사 the way나 관계부사 how 둘 중의 하나는 생략한다. | How | the way in[on, at] which 또는 the way that |
시간 (the time, the day, the week, the month, the year) | When | in[on, at] which |
예를 들어 다음의 관계대명사 표현을 보자.
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 욥기 23:10)
위의 표현에서 “He knows the way that I take”는 “He know how I take.”로 바꾸어 쓸 수 있다. 그 밖에 장소와 때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As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on their way, he came to a village where a woman named Martha opened her home to him.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 누가복음 10:38 )
Where는 village를 가리키며 where 이하의 표현을 village를 수식하는 형용사 절이다.
I tell you the truth; I will not drink again of the fruit of the vine until that day when I drink it anew in the kingdom of God.”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마가복음 14:25 )
이런 관계부사 역시 관계대명사와 마찬가지로 whenever 「∼할 때는 언제나」wherever「∼하는 곳은 어디나」 however 「아무리 ∼한다 할 지라도」와 마찬가지로 선행사를 포함한 표현도 가능하다.
Whenever I bring clouds over the earth and the rainbow appears in the clouds, I will remember my covenant between me and you and all living creatures of every kind.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 창세기 9:14~15)
I am with you and will watch over you wherever you go, and I will bring you back to this land. I will not leave you until I have done what I have promised you.”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 창세기28:15)
문법책에는 관계대명사의 계속적 용법이라는 것이 있다. 글을 쓸 때는 관계대명사 앞에 콤마(,)를 찍고 앞에 문장에 이어 계속해서 해석하는 용법이다. 다시 말해 관계대명사 이하의 표현이 앞에 있는 선행사를 수식하는 것이 아니고 앞의 문장과 대등하게 연결된 문장처럼 연이어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He is the stone you builders rejected, which has become the capstone.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사도행전 4:11)
그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다. 그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which가 앞의 the stone의 대명사로 계속해서 이어 해석해도 자연스럽다. 집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의 모든 기초를 하나로 묶어 주는 큰 모퉁이 돌을 말한다. 따라서 이 돌이 빠져버리면 건물이 내려 앉는다. 바울이 한 이 말은 성경 제 19권째인 시편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한 것이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 시편 118:22)
하지만 우리는 이런 계속적 용법뿐 아니라 모든 관계대명사의 표현을 계속적인 용법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그래야 읽어가면서 바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계속적 용법이 아니라고 뒤의 관계대명사절까지 읽은 후 다시 돌아가서 선행사를 해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음의 표현을 보기로 하자.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planted in his field.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태복음 13:31)
먼저 간단하게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고 말한다. 다음에 “그 씨는 사람이 자신의 밭에 가져다 심은 것이다.”라고 추가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도 위의 영어 표현과 같은 순서로 계속해서 이해해야만 한다.
위의 관계대명사나 부사에 관해 하나 더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많은 경우 목적격 관계대명사인 whom, which, that이 생략된다는 점이다. 바로 위에서 예로 든 ‘the stone (that) you builders rejected’가 좋은 예가 된다. 이 문장에서 돌(the stone)은 동사 rejected의 목적어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을 독립적으로 다시 쓴다면, “You builder rejected the stone”이다. 이를 관계대명사의 용법으로 사용하면 선행사는 관계대명사 이하의 목적어가 된다. 이런 경우 관계대명사를 생략할 수 있다.
[1] Sow 씨를 뿌리다, 파묻다 sown은 sow의 과거분사 뿌려진, 수놓은
[2] 참다, 견디다, 인내하다
[3] 인장, 도장, 보증,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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