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제작된 <매트릭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키아누 리브스는 네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다. 어느 날 그는 전설적인 해커 모피스(로렌스 피시번)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1999년으로 알고 있는 현재는 사실 2199년이며, 인공지능 컴퓨터 AI(Artificial Intelligence)가 가상현실을 담은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인간을 가축처럼 양육하면서 인간의 생체에너지를 자신의 동력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네오는 매트릭스라는 거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점차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의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네오는 모피스의 인도로 의식이 어느 정도 깨어 있는 존재, 오라클을 찾게 된다. 그 오라클이 부엌문 위에 ‘Temet Nosce’라고 쓰여진 팻말을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여 준다.“라틴어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지(It’s latin. Means “Know Thyself.)”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곤, 지혜를 찾으러 걸핏하면 산으로 간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요즘은 아마도 과외선생을 찾거나 학원으로 간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 곳에도 없지는 않겠지만, 지혜는 사실 어느 곳에나 널려있다. 어른들의 말씀부터, 성경과 같은 종교서적, 자기계발관련 도서, 그리고 각종 강연회까지 거의 비슷한 지혜가 다양한 모습의 지식 형태로 흘러나오고 있다. 아니 물리학과 생물학 그리고 경제학 교과서, 그리고 미술과 음악의 이론서에도 많은 생각의 방법이 담겨있다.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소설 속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시장과 일터 그리고 일과 후 돌아오는 길에서도 지혜를 만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주워담아 되새기면서 훈련하고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
너무나 흔한 평범함으로 숨겨져 있거나, 복합적이거나 때로는 도덕 교과서처럼 당위적이거나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고전이 된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도 그런 책들 중 하나이지만, 이전의 자기계발과 차별화된 포인트는 ‘내면의 변화’를 주장한다는 점이다. 맞는 말이다. 몇 가지 지식만으로 사람을 성장시키고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떻게 내면의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단 말인가? ‘내면의 변화’라는 것이 마음만 먹는다고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이 수시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그들이 우리를 잘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내가 변하는 것이 나의 생존과 성장에 필수적이라는 절박함 없이는 웬만해서 우리가 설득될 리가 없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라. 내 주변에 성공한 사람들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더 지적이거나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들은 한가지라도 꾸준히 한 사람들이다. 그런 과정에서 좋은 습관이 만들어지고 훈련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대부분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훈련이 필요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설득시키지 못했다는 말이다. 설득이란 단순히 머릿속으로 받아들여서 되는 것이 아니다. 감동을 받거나 깨달음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불행하게도 그런 깨달음은 어려움을 만났을 때 오기 쉽다. 깨달음은 그 내용이 나의 무의식까지 파고들어 나의 세포들까지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는 데 동의해야 한다. 그럴 때만 나의 몸과 머리가 훈련에 동참하고 실행에까지 이르게 된다.
자기계발 서적도 진화하고 있다. 단순하게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도리나 성현들의 말씀을 재구성하는 차원을 넘어서,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근거를 찾고 천재나 위인의 사례를 증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생각하라! 그러면 부자가 되리라>의 저자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은 자동차 왕 헨리 포드 같은 당대의 유명 기업인들에게서 성공의 법칙을 끌어낸다. 루트번스타인Root-Bernstein 부부의 <생각의 탄생>은 아인슈타인 같은 인류가 낳은 천재들의 예를 증거로 제시한다. 최근의 자기계발 서적은 우화 같은 이야기의 형태로 나타나 우리를 설득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과 시각을 조금 달리해서 과학이 이루어 낸 성과에서 그 근거를 찾아보기로 하자. 과학적 근거라고 해서 거창한 것들은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학창시절 배운 것을 기반으로 비교적 최근의 과학이 이루어 낸 성과의 일부에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미비하겠지만, 이런 노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우선 잘만하면 우리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노우와이(Know-why)를 찾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왜 그래야 하는지 또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이해하는 것만큼 강력한 설득 방법이 없을 것이다. 만약 충분한 노우와이를 얻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노우하우(Know-how)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자연법칙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이들 패러다임이 보다 정확해지고 더 좋은 기능을 발휘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이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자연의 법칙이란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를 이용해 무엇인가 한다면 그야말로 자연스럽고 수월할 수 밖에 없지만, 거꾸로 물을 위로 끌어 올리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앞 강에 물이 흐르듯’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순리(順理)대로 행한다고 이야기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이야기다. 이 말을 우리들은 “자기의 분수를 지켜라” 정도의 의미로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너 자신을 알라’의 원 의미는 신들에 대한 믿음에서 벋어나 스스로 세상을 성찰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의 심리학자와 뇌 과학자들은 그런 철학적 의미를 넘어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더 과학적으로 헤쳐낸다. “자기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그래서 단순히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우주와 나와의 관계 또는 신과 나의 관계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생각이 가지는 역량과 한계에 관한 이해를 포함하게 되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네 가지 이야기로부터 풀어나가야 할 것 같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스템 중에 가장 복잡한, ‘복잡계’라는 것이다. 복잡계란 간단히 말하면 많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구성요소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이다. 우리 인간은 다른 네트워크와 상호작용하며 생존하지만, 몸 그 자체 또한 네트워크로 구성된 복잡한 조직체다. 우리는 우주를 포함한 우리 밖의 모든 자연과 연계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며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편 안으로는 골격계, 근육계, 신경계, 소화계, 순환계 등 여러 복잡계가 협동함으로써 우리의 몸을 유지한다. 각각의 시스템은 다시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고 각 세포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우리는 생존하고 있다. 자동차를 만드는 데에 13,000개의 부품이, 747제트 여객기를 만드는 데에 3,000,000개의 부속품이,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데에는 5,000,000개의 부속품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약 60조에 달하는 세포 조직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에 비교할 수 없다. 우리의 몸은 정말 복잡하다.
두 번째 알고 있는 우리 이야기는 우리 모두 진화된 생명체라는 것이다. 진화라는 표현 때문에 인간이 아메바나 원숭이로부터 생겨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의 진화론은 아직도 가설이며, 학자들간의 논쟁이 진행중인 문제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여 변해왔고 또 그런 능력 때문에 오늘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진화를 학습알고리즘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학습을 통해 진화해 왔고, 다른 세포나 생물체처럼 생존과 성장 그리고 번식을 목적으로 살아있다. 하나하나의 세포는 자신의 생존과 복제를 위하여 존재하는 이기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도 이기적이 된다. 인간에게 이타적인 본성이 존재하지만, 이 조차도 결국은 생존과 성장을 위해 요구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여기에 물론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삶의 목적을 더할 수는 있겠지만, 생존과 성장 그리고 자기복제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뇌가 만들어 내는 정보처리 과정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뇌 자체가 생물학적 컴퓨터다. 구조에 있어서도 컴퓨터와 우리의 뇌는 많이 닮아있다. 컴퓨터의 내부 기관은 수많은 회로소자와 전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우리의 뇌는 1000억 개의 뇌세포와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100조개의 시냅스(Synapse)가 만들어 내는 슈퍼컴퓨터다. 컴퓨터와 인간의 뇌 사이에 다른 측면이 많이 존재하지만, 컴퓨터는 디지털 즉 0과 1로 생각하고 우리 자신은 뇌세포가 구성하고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 생각하고 기억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컴퓨터와 인간의 생각을 비교함으로써 우리의 능력과 한계에 대해 더 분명한 지식을 얻을지 모른다.
우리에 관한 마지막 이야기는 실제로 우리 생각의 99%이상이 무의식에 의해 처리된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2%에 해당하는 뇌가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20%이상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 그런 정보처리 과정의 대부분을 무의식이 담당하고 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을 무의식에 의지하고 있는 셈이다. 역으로 우리에게 무의식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이 엉망이 되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런 무의식을 통해 일상을 유지하고 있음으로, 무의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삶의 상당부분이 무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 더 나아가 이런 무의식에서 우리의 경쟁력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생명과 의식에 대한 과학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식이 가정이나 가설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물리학자 리차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의 표현대로 ‘진리나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의 근사적인 서술’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자연과학이 밝혀낸 것이 이러할 진대, 현실적인 실험이 거의 불가능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이 얻어낸 성과는 그야말로 가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과거의 대가들이 주장하던 이론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정말 황당한 사실로 밝혀진 것도 수두룩하다. MIT의 역사학자 브루스 매즐리시Bruce Mazlish는 그의 저서 <네 번째 불연속-인간과 기계의 공진화>에서 인류 역사상 인간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준 세 개의 사상이 있다고 지적한다. 지동설, 진화론, 정신분석학이 그것이다. “코페르니쿠스로 해서 인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은커녕 거대한 우주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으며, 다윈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적 지위를 빼앗았고, 프로이트는 상처 입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라 믿었던 이성을 또다시 무의식의 하수인으로 격하시켜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상에 관한 진실을 찾아내고 우리 자신에 대한 비밀을 알아가는 것이 왜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는 그 전까지 우리는 매우 오만하거나 아니면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아주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거나 아주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많은 과학자들이 수고해 발견한 지식에 조금의 상상력을 보태면, 우리들이 경험하는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는 있다. 무리하게 과학이 밝혀낸 인간의 모습 몇 가지를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역시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자연현상에 가까울수록 그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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