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역사를 지배한 것은 항상 승리의 법칙이었다. 그 외의 다른 법칙은 없다.” – 나폴레옹
무릇 모든 역사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론상 역사는 지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여야 하지만, 우리가 역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승자들이다. 로마는 로마 시(市)로부터 시작하여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를 넘어 유럽전체를 지배한 그야말로 제국이었다. 395년 로마가 동서로 분열된 후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하였지만, 동로마 즉 비잔틴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하였다. 로마는 그렇게 2000년을 살아남았다.
반면 로마인보다 앞서 이탈리아 반도에 최초로 독자적 문화를 남기고, 로마의 초기 왕정시대인 BC 616년부터 BC 510년까지 로마를 지배하기도 했던 타르퀸 왕조의 에트루리아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로마는 이 에트루리아와 벌인 전쟁의 승리를 발판으로 제국이 되었고, 에트루리아라는 이름과 민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허긴 고대의 전쟁은 승자독식의 경쟁이다. 로마는 BC 396년 에트루리아인의 베이이(Veii)성을 점령한 후 남자들은 몰살하고 여자들은 모두 노예로 삼았다. 이 성을 공략할 때의 로마장군이 <플루타크 영웅전>에 등장하며 제 2의 로마 건국자라 불리는 카밀루스다.
하지만 로마 역시 어디선가 간신히 살아남아 이곳으로 이주해 온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영화 <트로이>의 마지막 장면에 지하의 비밀통로로 빠져 나가는 몇 명의 무리가 그들인지도 모른다. 전설에 의하면 트로이가 불타고 있을 당시 트로이 왕의 사위 아이네이스와 그를 따르는 일족이 트로이를 빠져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지역을 거쳐 이탈리아 서해안에 상륙하고 도시를 건설하는데 그 곳이 바로 로마다.

로마의 전설이 역사적 사실인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로마는 과거 어느 지역의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고 도망쳐온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주장이 매우 합당해 보인다. 로마의 초기 구성원들이 주로 독신 남자들이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로마의 시조 로물루즈가 맨 처음 추진한 국책사업은 독신남자들 장가보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로마에는 결혼할 여성조차 존재하지 않아 이웃하고 있던 사비니 족에서 신붓감을 강탈해 와야만 했다. 로마의 초기 집단은 자신들의 가족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빼앗긴 무리라는 이야기다.
이들뿐 아니라 고대의 전쟁에서 승리자는 모든 것을 차지하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해도 패자의 운명은 승자의 손에 달려있게 된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역사를 지배한 것은 항상 승리의 법칙이었다. 그 외의 다른 법칙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경쟁은 어떤가? 얼핏 보기에 매우 공평해진 것 같지만 승자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경쟁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경쟁에서의 제 일 법칙은 승패의 법칙이며 승자독식이 그 결과인 셈이다.
경쟁의 방식과 게임의 룰이 명확한 스포츠의 경쟁을 보자. 가리비가 북경 올림픽에서 준우승을 한 사실에 “은메달이 어디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두 선수의 실력과 노력의 차이에 비해 보상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완지루의 이름은 가리비의 이름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더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마라톤에서 두 명의 우승자가 생기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오늘날의 정밀 시간측정 도구는 몇 분의 몇 초까지 구별해 낼 것이다. 마라토너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올림픽과 같은 세계적인 대회에서 단 한차례라도 우승한다면 성공한 사람이다.
우승자는 강한 자이기도 하지만 매우 행운아이기도 하다. 그날의 환경과 자신의 컨디션이 최고로 맞아 떨어져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 한다. 실력만으로 승리를 얻어내는 것은 아니다. 일년에도 수없이 개최되는 테니스나 골프 대회에서 늘 우승자가 바뀌는 것을 보면 그렇다.
사실은 일반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 행운아다. 아니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마라토너가 아니라도 우리 모두 탄생 초기부터 2억이 넘는 경쟁자들과 2시간 넘는 레이스를 펼친 끝에 우승한 존재들이다. 그렇게 2억에서 5억의 경쟁을 뚫고 한 생명으로 탄생한 것만으로는 기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부모 두 분은 어떠한가? 그들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지난 수십만 년을 기후의 변화, 음식의 부족, 그리고 전쟁의 광기라는 모든 위험과 역경을 넘어 최소 50만 세대를 이어왔어야 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적이겠는가? 아니면 그들은 정말 슈퍼맨, 원더우먼보다 더 강한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가 존재함은 그들이 단 한번의 실패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조상들은 수도 없는 경쟁을 치러내야 했을 것이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경쟁에서의 패배자는 막중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오늘날 단 한번의 경쟁이 생존과 직접 관련이 없을지 모르지만,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삶과 승리한 사람과의 차이가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둥근 돌이와 모난 돌이가 숲 속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 만치에서 늑대 한 마리가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뭐라고 대화를 나누더니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늑대는 계속해서 그들을 쫓았고 조금 뒤쳐진 둥근 돌이를 공격했다. 그 사이에 시간을 벌은 모난 돌이는 무사히 마을까지 도망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경쟁을 하게 된 상황이다. 그리고 그 경쟁의 차는 생과 사를 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승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사라진다.
단 1점 차이로 대학입시에서 낙방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수 많은 대학에서 매년 1점 차이로 경쟁에서 낙오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경쟁으로 인한 차이는 인생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단 한 명을 뽑는 취업이나 단 한 편의 우승자를 뽑는 컨테스트는 또 어떤가? 아주 근소한 차이로 세상이 달라지고 만다. 그런 것이 경쟁이다. 그리고 실제 실력의 차이는 미미할 정도이지만 얻고 잃는 것은 성공한자와 실패한자로 갈라놓고 만다. 경쟁의 차는 이렇게 크다.
오늘 날 패배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승자가 호사스러운 승리를 만끽하는 동안, 패자는 새로운 경쟁을 찾아나서야 한다. 경쟁은 이처럼 승자와 패자를 가르기 마련이다. 이런 승패의 법칙을 정글의 법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약육강식이라는 그야말로 지극히 잔인한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 자연을 바라보면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냥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먹이를 위한 경쟁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다. 거기다 다른 포식자의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온 자연을 관장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같은 가족끼리도 서열을 정하는 경쟁과정을 거치게 된다. 동물의 세계에서의 서열은 번식과 관련이 있다. 처음 만나는 같은 종의 동물들은 우선적으로 서열을 정한다. 우리들이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리 가족 모두를 우선적으로 서열로 인식한다. 아직 판단력이 없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대체로 그들의 서열 아래에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동물의 세계에서는 보통 가장 강한 수컷이 다수의 암컷을 거느리며 먹이에 있어서도 우선권을 가진다. 승자가 거의 다 가진다는 말이다.

약육강식의 현상은 동물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평화롭게 보이는 숲 속에서도 생존의 경쟁은 일어나고 있으며, 집 앞의 아름다운 정원에서도 약육강식이 벌어지고 있다. 소나무의 뿌리에서 나오는 독한 물질인 칼로탄닌으로 다른 식물의 접근을 막는다. 그래서 소나무 근처에는 흔한 잡풀조차 자라지 못한다. 우리가 숲 속에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테르펜(terpene)이라는 물질 때문이다. 이 물질은 살균, 진정, 소염 등 20여 가지 이상의 약리 작용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숲에서 좋다고 호흡하는 피톤치드는 ‘식물’을 뜻하는 phyto와 ‘죽이다·살균하다’를 의미하는 cide가 합성된 단어로 그 어원처럼 식물성 살균 물질을 총칭한다.
식물은 외부에서 적이 부딪치거나 자극을 가하면 자신의 몸을 방어하려고 피톤치드 같은 살균 물질을 발산한다. 피톤치드 같은 물질도 알고 보면 식물의 전쟁 무기인 셈이다. 그 때문에 인간에게는 유익하며 산림욕 효용의 근원이 된다. 이런 전쟁이 화학전이라면 서로 힘으로 맞붙는 백병전도 있다. 이런 백병전의 강자는 덩굴식물이다. 덩굴식물들은 곧게 뻗어 있는 나무들에 의지해 자란다. 하지만 아직 크게 자라지 못한 어린 나무는 그 덩굴에 의해 햇빛이 차단되어 죽어 버리기도 한다.
세균이나 곰팡이 같은 미생물계에서도 약육강식은 예외 없이 나타난다. 유산균이 차지한 발효식품에는 다른 나쁜 균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이 균형이 무너진다면 장에 유산균 저장 창고를 가진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병원균의 침습으로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말과 글로 삶을 장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세상사는 생존과 번영을 위한 경쟁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생물이 경쟁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협력과 공생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관찰을 통해 협력이 더 좋은 삶의 기술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협력조차도 나의 인생과 나의 후손들을 위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쟁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것은 곧바로 경쟁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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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인간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인간이 이기적인 이유를 <이기적인 유전자>의 저자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우리의 유전자에서 찾는다. 아니 그는 인간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 유전자의 목적은 자신의 복제를 가능한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보존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것이며, 그런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유전자가 조정하고 있는 셈이다. 살아있는 가장 작은 단위는 세포다. 우리의 몸도 세포로 이루어 져있다. 그런데 그들 세포도 아니고, 세포 안의 핵에 들어 있는 염색체도 아니고, 염색체를 구성하고 있는 DNA도 아니고 그 DNA를 구성하고 있는 30억 개의 염기 중 극히 일부인 약 3만개의 유전자가 우리를 꼭두각시처럼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도킨스의 말이 맞든 안 맞든 우리 모두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분명하다. 이타성이라는 특성이 있기도 하지만 이 역시 인간의 이기적인 만족을 위해 존재한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인 사람들이라고 해도 강제로 봉사의 의무를 부여한다면, 아마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지 못할 것이다.
이기심은 다양한 욕구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이나 동정 등도 이타적인 욕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이기적이란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성취하기 위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존과 번식도 그런 욕구 중에 하나다. 하지만 인간에게 그런 동물적인 욕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인정받고 싶은 사회적 욕구와 자아성취와 같은 성장에 대한 욕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공존하려는 이타적인 욕구도 있다.
인간의 욕구에 있어 특이한 점은 아브라함 매슬로우의 이론처럼 욕구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아브라함 H. 매슬로(Abraham H. 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가지 단계로 나누고, 아래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위의 단계에 있는 욕구를 갈망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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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슬로가 분류한 욕구가 우리가 가지는 욕구의 전부라는 것도 아니고, 그의 이론이 모두 맞는다는 것도 아니다. 그의 이론은 가설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생존에 대한 욕구를 우선시 한다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음악을 좋아해도 생활이 안되면 결국을 그렇게 아끼던 바이올린을 내다 팔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보통사람들은 체면보다는 자신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여하튼 우리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너무나 자연스런 이기심과 자연의 순리인 것처럼 보이는 불평등의 법칙을 거슬러 자신에게는 물론 사회전체에 도움이 되는 기술이나 제도를 발전시켜왔다.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장에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후손에게 미치는 미래의 이익까지 고려할 수 있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욕구를 이타적 욕구라고 할만하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이런 욕구들이다. 즉 오늘날 인간이 갈구하는 욕구는 생존과 안전과 같은 하위욕구가 아니라 영성과 감성을 만족시켜줄 상위욕구 말이다.
자원의 희소성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트로이>의 배경이 되는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가 원작이다. 일종의 신화 같은 이야기로 전해졌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유적의 발굴과 역사적 연구에 의해 실제로 존재했던 전쟁으로 밝혀졌다. 역사의 기록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전쟁인 셈이다. 역사학자들은 트로이 전쟁이 기원전 14~13세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스의 남쪽 에게 해 주변에는 미케네 왕국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지금의 터키 땅에는 히타이트 제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트로이는 히타이트 제국의 한 도시다.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을 영웅들이 펼치는 모험과 로맨스로 그려낸다. 하지만 이들이 벌인 전쟁은 삶을 위한 투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트로이, 잊혀진 신화>의 저자 마이클 우드는 미케네 왕조가 성립된 지중해라는 바다는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의 여건이 되질 않았고 히타이트가 성립된 지역도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들은 ‘약탈’이 없으면 경제 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찬양되고 있는 영웅들은 위대한 덕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약탈에 능한 자들일 뿐이다. 그 근거로 <일리아드>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23번이나 도시를 약탈한 것을 자랑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가운데 역사학자 윌리엄스 스티빙 William Stiebing의 논문 <청동기 문명의 종말: When Civilization Collapsed: Death of the Bronze Age>에 의하면 기원전 1300년경에는 지중해 전역에 인구과잉과 함께 가뭄과 기근이 닥치게 된다.
이런 식량부족 상태에서 원래 약탈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던 미케네 왕조는 상황타개를 위해서 곧바로 약탈 원정에 나섰으며, 그들이 노린 곳 중의 하나가 바로 트로이라는 것이다.
이들뿐 아니라 이기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제한된 자원이라는 환경을 만나면 경쟁을 하게 되어 있다. 자신의 욕구가 우선시 되기 때문이다. 경쟁이란 인간의 욕구와 자원이 부족한 세상을 만나면 늘 생기는 현상이다. 지구상이든 어디든 자원은 희소하다. 그런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거나 재창조하지 않는다면 늘 그 귀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전쟁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다’라는 문구는 곧 인류의 역사가 전쟁과 함께 해왔음을 시사한다. 길게 보면 우리 인간의 역사에 기록된 3,421년 중에 전쟁이 없었던 해는 268년에 불과함을 지적을 하였다. 그렇다면 현대에 와서는 조금 더 나아졌을까? 그렇지 않다. 엘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전쟁과 반 전쟁'(War and Anti-War>에서 1945년부터 1990년까지의 2,340주 동안 지구촌에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단 3주일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년 정도 계속 싸우다가 일주일씩 쉬었을 뿐이다. 경쟁의 최악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이 사실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을 통해 인류는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왔고 전쟁을 통해 지도를 다시 그렸으며 전쟁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왔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더러는 문명의 소산이라고 말할 테고, 더러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할 때 전쟁은 일어난다.

나폴레옹과 같은 시대의 군인이며 <전쟁론 Vom Kriege >의 저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목적이란 정치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점잖게 정의하고 있다. 전쟁이란 집단 간의 대립을 넘어 정치적 행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쟁은 부에 대한 경쟁 때문에 일어난다. 과거 전쟁의 승리는 바로 부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군사를 일으켜 전쟁에서 상대 국가를 제압한다면, 그들의 문명은 물론이고 비축된 곡식과 개간된 농지, 그리고 노예와 군사를 얻을 수 있었다.
로마가 전쟁을 지속한 것도 결국은 부를 얻기 위함이다. 로마가 자리 잡은 이탈리아 반도는 그다지 풍족한 지역이 아니었다. 또한 불어나는 인구에 비해 영지는 비좁았으며, 금속이나 광물 혹은 가공물의 생산도 적었다. 로마의 정복전쟁은 부를 향한 욕심이 만들어 낸 것이다.
<전쟁의 역사>의 저자 몽고메리는 고대 근동의 역사에서 모든 전쟁은 인구과밀에 있다고 단언한다. 최초의 문명은 강을 끼고 있던 비옥한 땅에서 시작되었다. 이 비옥한 땅에 인구가 밀집했고, 그렇지 않은 지역은 너무나 척박해서 살기가 어려웠다. 강의 유역에서 서로 물이 풍부한 땅을 한치라도 더 얻기 위해 서로 싸웠다. 이런 경쟁의 패배자는 결국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이기심과 자원의 부족함이 경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오늘날 소비자들도 제품과 시간의 희귀함에 경쟁심이 발동된다. 판매자가 내걸은 ‘한정판매’ 또는 ‘매진임박’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희귀성을 연상시켜 소비자들의 경쟁심리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보통 물질적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지구상에서 생산할 수 있는 농산물도 한계가 있고, 석유나 석탄도 제한적으로 얻을 수 밖에 없다. 자원의 물질적 희소성으로 인해 경쟁이라는 수단을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되어 있다. 만약 미국이 자국 내에서 석유의 대체 물질을 발견하거나 재창조할 수 있다면, 아랍과 미국의 갈등이 해소될지도 모를 일이다.
경쟁을 줄이거나 더 생산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원의 희소성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행히도 인간은 협력에 의해 서로 가진 것을 빼앗는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을 창조할 수 있고, 자신의 몫도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럼에도 경쟁이 끝이 난 것은 아니다. 경쟁의 방법이 변하고 경쟁에 대한 보상 형태가 변하기는 했지만, 남보다 더 가지려는 경쟁은 계속되고 있다.
반면 오늘 인간이 추구하는 욕구는 물질적 자원에 의해 만족되는 하위욕구에서 점차 자신의 성장과 남과 공존하려는 상위욕구로 옮겨가고 있다. 상위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석유와 같은 에너지나 식량이 되는 자원처럼 제한된 자원이 아니라, 디자인과 이야기와 같이 물질적 자원 없이도 인간의 창의력만으로 무한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다.
생물학에 경쟁하는 두 종(種)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똑 같은 방법으로 살 수 없다는 경쟁배타의 법칙이 있다. 자원이 제한된 조건에서 두 개의 종은 같은 방식으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학이라는 학문 역시 자원의 ‘희소성’과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한다. 경제문제란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데 비해서 그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자원이 희소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이 희소성에서 나온다. 경쟁이란 한 마디로 선택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공을 원한다면 가능한 합리적인 선택을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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