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 제 1교시: 물리 시간-세상이 그렇게 복잡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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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밀양>은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10만이 조금 넘는 인구를 가진 한 도시의 지명이다. 밀양은 귀에 익은 지명이어서 무심히 받아들이지만, 한자로 표기된 밀양(密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햇볕이 빽빽하게’ 들어찬 동네를 의미한다. 그러나 영화 <밀양>은 주인공 이신애(전도연)의 말처럼 밀(密)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를 사용해 <Secret Sunshine〉으로 번역되어, ‘비밀스런 햇볕’ 이라는 멋진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에서 남편을 잃은 신애는 남편의 추억이 담겨있는 밀양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신애는 밀양사람 김종찬(송강호)을 만나게 된다. 신애의 남동생 서울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밀양은 어떤 곳이죠?” 밀양 사람 종찬은 이렇게 답한다.

“똑같아 예. 딴 데하고.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예.”

바둑판은 가로 19줄 세로 19줄 해서 총 361개의 점으로 되어 있다. 그 곳에서 나오는 경우의 수는 1에다 0을 7백 개정도 붙여야 한다. 똑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이 65억이 넘는 인간이 21,900일이 넘게 사는 동안에 만들어 내는 경우의 수는 어떨까?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서 바둑판을 바라보듯 관찰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하루가 한판의 바둑이라고 해보자.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가 있을까? 바둑과 인간의 삶이 같은 조건이 아니니 비교한다는 것이 무의미 할지도 모르지만, 정말 수많은 경우의 수가 나올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바둑에 있어서 동일했던 대국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을 하지만,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한 사람의 인생도 다른 사람과 같을 확률은 더 희미할 수밖에 없다. 항상 일정한 바둑판과는 달리 세상이라는 환경자체가 인간의 삶과 함께 변해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세상이 정말 그렇게 복잡할까?

밀양 사람 송강호의 말처럼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똑같다는 것을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복잡계 과학에서는 이것을 프랙탈이라고 부른다. 프랙탈이란 세부 구조가 끊임없이 전체 구조를 되풀이하고 있는 현상을 의미한다. 밖으로 나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서있는 나무를 바라보라. 모든 나무는 큰 줄기에서 가지로 뻗어나가 더 작은 가지를 만들고 작은 가지는 다시 같은 모양의 더 작은 잔가지로 뻗어 나간다. 나무의 줄기뿐 아니라 지면 아래로 뻗은 뿌리도 같은 패턴의 반복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프랙탈로 겨울에 내리는 눈(snow)의 결정 모양을 꼽는다. 눈의 결정 모양을 확대하여 일부를 관찰해 보면, 그 모습이 전체 결정모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것이 프랙탈이다. 프랙탈이란 개념은 복잡한 모양을 수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해안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는다. 1967년 프랑스의 수학자 베노이트 만델브로트Benoît Mandelbrot는 과학 잡지 <사이언스, 1967. 5. 5>에 ‘영국을 둘러싸고 있는 해안선의 총 길이는 얼마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 “해안선이 아주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계적으로 확대해 들여다보면 마치 나뭇가지처럼 비슷한 모양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런 구조를 ‘쪼개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프랙투스(Fractus)’에서 따와 ‘프랙탈’이라 명명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구름이나 번개, 강, 나무, 그리고 겨울철 유리창에 서리는 성에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깨어진 유리의 파편 그리고 내동댕이쳐진 감자의 조각 모양에서도 나타난다. 자연계뿐 만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기는 해야 하지만, 이런 현상은 인간 사회와 역사 속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시대마다 저마다의 모습을 가지는 역사이지만, 큰 줄기로 보면 같은 패턴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증권 시장의 움직임도 과거를 돌아보면 누군가 그려낸 듯한 일정한 주기와 패턴을 갖고 반복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바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말 똑 같은 대국은 없을지 모르지만, 패턴으로 보면 비슷한 대국은 얼마든지 있어왔다. 그렇다. 정확도만 포기한다면 이 세상은 비슷한 패턴으로 구성되어 있고, 유사한 삶이 계속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현상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고 또 운행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지만, 분명히 그리 복잡하지 않은 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짐작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재와 같이 우주가 안정되어 있고 우리와 같은 생물이 생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충 만든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없다. 많은 조건을 갖추기 위해 300만개가 넘는 부품이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다. 하지만 그 원리는 간단하다. 중력을 이겨낼 정도로 빨라야 한다는 것이다. 중력과 평형을 이룰 정도의 양력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우주가 만들어 진 것도 기적이지만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기적이다. 이런 상태를 창조주가 만들었던지 아니면 정말 우연히 나타난 현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이 창조주 없이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하자. 그런 경우라도 현재의 상태가 되기 위한 조건들이 존재한다. 사실 그 중에 하나의 조건만 바뀌더라도 현재의 우리는 존재하기 어렵다. 이 세상이 만들어진 방법이나 작동의 원리는 바로 그 조건들을 성립하게 하는 것들이어야 하며, 바로 그 조건들에 세상의 법칙이며 자연의 법칙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조건들이 정말 아슬아슬한 것들이기에 그 작동의 원리는 정교하고 분명한 종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단 여섯 개의 수>의 저자 마틴 리스Martin Rees는 그 여섯 개의 숫자가 우리 우주를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틴 리스가 이야기하는 여섯 개의 숫자는 중력과 원자들 사이의 결합력, 우주의 팽창, 우주의 차원등과 관련된 숫자들이다. 만약 그 숫자들 중에 하나라도 조금만 달라지면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을 수 없게 된다. 약 137억년 전의 대폭발 즉 빅뱅 직후에 있었던 급작스러운 인플레이션 덕분에 수많은 은하와 별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46억년 전에는 태양과 함께 우리의 지구가 탄생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우주론의 줄거리다. 이 우주가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마틴 리스가 말하는 6개의 숫자는 바로 이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중력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중력이 지금보다 더 강했다면 우주 전체가 쭈그러들었을 것이다. 행성들이 서로 너무 거세게 잡아 당겨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중력이 너무 약했다면 아무 것도 뭉쳐지지 못해 우리가 살만한 크기의 행성이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 이는 빅뱅 순간의 팽창 에너지 때문이다. 이 우주의 팽창과 관련된 숫자도 우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팽창이 너무 빠른 우주는 곧바로 종말을 맞이하게 되고, 너무 느린 우주는 영원히 미성숙 단계에 머무르게 되어버렸을 것이다. 사실 팽창에너지와 중력은 상호관련이 있는 것이다. 팽창 에너지가 조금만 더 커서 중력의 힘을 능가했더라면 별이나 은하가 생성될 수 없었다. 반대로 팽창에너지가 조금만 더 작았더라면 생명체가 탄생하기도 전에 우주가 수축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현재의 우주는 빅뱅시의 팽창에너지로 인한 팽창하는 힘과 중력으로 인해 수축하는 힘이 거의 일치할 만큼 가까운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덕분에 존재하고 또 우리가 생존하고 있는 셈이다. 마틴 리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우리 우주는 무한히 많은 우주 중에 하나이거나, 지금까지 수없이 만들어진 우주 중에 기적같이 모든 것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특별한 우주라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을 우연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오늘 날의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무한대의 우주가 그 전부터 만들어져 와야 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무한대로 시도된다면 아무리 정말 작은 확률에 나타날 수 있는 것도 만들어 졌을 테니 말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폐차장에 돌풍이 불어와 그 많은 중고 부속품들이 모여 움직일 수 있는 자동차가 만들어 질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일도, 돌풍이 무한대로 분다고 가정하면 가능하다. 무한대란 이론적으로 그런 기적이 일어날 때가지 지속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주와 관련한 여섯 개의 숫자 이외에도 필요한 조건들이 있다. 이에 관련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약 20개 정도라고 한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쓴 빌 브라이슨Bill Bryson은 그런 인간의 생존조건을 몇 가지 더 소개한다. 그 중 하나는 태양과의 거리다. 지구가 태양에서 1% 더 멀리 떨어져 있었거나 아니면 15% 더 가까이 있었으면, 생물이 살지 못했을 것이다. 달도 빼놓을 수 없는 우리의 생존조건이다. 달이 중력을 이용해서 지구를 안정시켜주는 덕분에 지구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생물이 성공적으로 탄생할 수 있도록 적당한 속도와 적당한 기울기로 자전을 계속할 수 있다.


여하튼 우연히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고 또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면, 역설적으로 분명히 명확한 원리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한 문제에 조건이 없다면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지만, 조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문제의 답은 제한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관한 법칙이 꽤 단순 명료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다.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가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우주가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 진 세상이라면 분명히 마음속에라도 설계도가 존재했을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것에 대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며 작동의 원리를 갖추어 놓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여하튼 이 세상은 막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리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전 하버드 대학의 지질학자 커틀리 매더Kirtley F. Mather는 다음과 같은 그의 생각을 남겼다.




우주가 법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곧 이 세상이 확정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중에 좀 더 논의하겠지만, 우리는 불확정 또는 불확실성의 우주에 살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큰 세계에서 작은 세계로 갈수록 불확실성은 더 커지는 것 같다. 우주, 자연, 인간사회, 인간, 원자, 소립자의 세계로 갈수록 불확정성이라는 특징이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우주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확률의 법칙인지도 모른다. 단지 큰 세계에서는 그 자체가 너무 커서 불확정성이 무시할 정도로 미약한 반면, 미시세계에서는 불확정성이 중요한 요소일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우주나 자연은 너무 커서 평균치만 보이고, 사소한 것들을 못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시세계로 갈수록 구성원이 많아지고 따라서 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가 많아지기 때문에 더 복잡한지 모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연이 생긴 우주이던 아니면 창조된 우주이던, 인류는 먼 옛날부터 그런 우주의 원리를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여기서 말하는 우주란 단순히 별들이 자리잡고 있는 우주가 아니라 우리가 알아야 할 상대방을 모두 품고 있는 우주를 의미한다. 이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 져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운 또는 힘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생명도 물질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힘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생명체 중에 인간은 물리적인 힘 이외에 정신이라는 기운을 가지고 있어 더욱 특별해 진다. 수많은 학자들이 대충 물질, 힘, 생명, 인간, 정신 이 다섯 가지를 가지고 씨름해 오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그들의 성과를 통해 이 세상에 대해 제법 많이 알게 되었다.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현재의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정도는 알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은 수억 개의 화학물질로 이루어 져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100개 정도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화학물질이라는 것은 분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 분자는 원자의 결합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자연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는 92개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원자에 대해서도 알 만큼 안다. 원자는 다시 양자, 중성자, 전자 등의 소립자로 이루어 져있고, 이들은 더 이상 나누어 질 수 없는 쿼크라는 입자로 구성된 복합입자다. 단순하다. 물론 이 원자의 안이 거의 텅 비어있고 그 안을 전자가 도깨비처럼 이리저리 뛰어 다닐 뿐 아니라, 홍길동이처럼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나타난다는 사실들을 우리의 직관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류는 핵융합과 핵분열을 통해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물질에 대하여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물질은 없어지거나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 만들어 지지도 않는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우주에 있는 물질의 총량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인간에 있어서도 이 법칙은 적용된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존재에 관한 것이라면 변화에 관한 법칙도 알고 있다. 변화의 근원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힘이다. 기 또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물질 자체가 힘이기도 하다. 물질에는 질량이 있다. 그 질량 자체가 에너지라고 아인슈타인은 그 유명한 E=mc² 를 통해 증명했다. C는 상수 즉 변하지 않은 숫자이니 에너지=질량이 된다. 질량의 단위를 상수 C가 포함하는 단위로 바꾸면 이 식은 완벽하다.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은 자연에 4가지 힘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 힘은 각각 전자기력, 강력, 중력, 약력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전자기력은 과거에 독립적으로 알고 있던 전기와 자기가 결국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만들어진 합성어다. 전자기력과 중력의 작용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질량을 지닌 모든 물체들 사이에 잡아당기는 힘, 즉 만유인력이라 불리는 중력으로 인해 사과가 사과나무에서 떨어지고 행성이 태양 주위로 궤도를 그리며 돌게 된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중력으로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도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자 속의 전자와 원자핵 사이의 밀고 당기는 전자기력으로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다. 강력과 약력은 20세기에 물리학자들이 원자핵 내부를 연구하다가 발견한다. 원자핵은 양극을 띠고 있는 양성자들이 가까이 모여 있기 때문에 서로 거세게 반발하는데, 강력이 이 힘을 이겨내고 양성자들과 중성자들을 단단히 묶어놓는다. 그러니까 강력의 힘이 전자기력보다 훨씬 더 센 힘이다. 약력은 방사능 붕괴를 일으키는 힘으로 원자핵이 붕괴하는 원인이 된다. 전자기력과 단순 비교하여 이해하면, 약력은 입자가 붕괴하는 힘이며 강력은 반대로 입자가 뭉치는 힘이다. 이런 힘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 네 개의 힘도 결국은 하나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과 시간을 합친 4차원을 넘어 11차원의 세상까지 넘나들고 있는 중이다.

이런 힘에도 법칙이 존재한다. 바로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에너지가 그 형태를 바꾸더라도 그 전체의 양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우주의 어느 곳에서도 성립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질량보존의 법칙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좀더 일반화되어 인간의 삶으로 들어 오면 인과율의 법칙이 된다. 인과율이란 “실제 세계에서의 존재나 사건에는 반드시 그것을 발생시키는 근거가 있다”라는 법칙이다. 여기서 근거를 ‘원인’이라 하고 그것에 의하여 발생되는 것을 ‘결과’라 하며 이 두 개의 관계를 인과관계라 부른다. 이런 인과의 법칙은 생명과 생각에도 적용된다. 자연과학의 증명과 같은 수치를 내놓을 수는 없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들이다. 모든 생명은 어디에선가 에너지를 얻어와야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원인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다.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결코 얻고자 하는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는 말이다.

힘의 관한 법칙은 이 세상의 변화를 설명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서 에너지가 보존된다고 하는 것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난 경우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움직이기 위해 휘발유를 연소시켰다고 해보자. 그 전후의 에너지 총량에는 변함이 없어, 사용된 에너지와 배기 가스의 에너지를 합하면 휘발유가 원래 가지고 있던 에너지와 같게 된다. 배기 가스에도 나름대로의 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문제는 이들을 아무리 모아 보아도 이미 연료용으로는 사용할 수는 없다. 일종의 ‘에너지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고 이해해도 된다. 에너지의 양은 같지만 왜 그렇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열역학 제 2 법칙, 또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열역학 제 2법칙은 ‘한 시스템이 점차 질서에서 무질서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현상을 가리키며, 이를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표현한다. 우주에 있는 모든 질서, 구조 및 패턴은 시간이 가면서 고장 나거나 약해지면서, 모두 다 작은 조각으로 분해된다. 철은 부식되고, 빌딩은 무너지고, 나무는 썩어가고, 생명은 늙어간다. 질서가 존재하던 구조가 점차 무질서해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타버린 휘발유가 남긴 ‘에너지 쓰레기’는 무질서해진 에너지다.

그런데 왜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엔트로피 법칙을 위반하여 더 조직화되고 성장해 가는가? 그들은 제 2 법칙의 결과를 상쇄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가를 치른다는 말이다. 거미는 거미줄을 만든다. 그러나 곧 부수어지고, 거미는 또 다른 하나의 거미집을 만들어야 생존할 것이다. 우리가 노동을 통해 건축해 놓은 집도 마찬가지다. 수리하고 보수하지 않으면 점차 망가져 간다. 실제로 우리 인간도 그리고 우리가 잘 만들어 놓은 조직도 가만히 나두면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사과가 썩고 철이 녹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어떤 종류이던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조직이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늘 에너지가 필요하다. 쇠퇴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조직에 자극을 주고 변화를 주어야 한다. 집안의 새로운 분위기를 위하여 가구를 새롭게 배치하듯이 말이다. 과학자들은 이처럼 무질서한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이런 행위를 ‘조직화’라고 부른다.

위의 예는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의도적인 노력에 의한 조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연에는 의지가 없음에도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나무가 자라고 어린이가 성인이 되는 것이 무슨 의지를 가진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사실 생명의 탄생 자체가 엔트로피 법칙을 거슬리는 것처럼 보인다. 생명이 없는 단백질과 지질, 핵산이라는 분자가 모여 무수한 화학 반응을 하면서 하나의 세포를 이루어 낸다. 세포가 모여 조직을 이루고, 조직이 모여 기관을 이루고, 기관이 모여 우리 몸을 이루는 과정이 모두 조직화이며 무질서에서 질서가 만들어 지는 현상이다. 이런 일은 생명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분자들이 모여 결정이 성장하는 것도, 온순한 바람이 점점 그 강도를 더 해가며 태풍으로 발전되는 것도, 무질서에서 질서가 만들어지는 예가 된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이 엔트로피 법칙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다. 나무가 성장하고 아이들의 자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의 저자 프리고진Ilya Pregogine은 에너지의 출입뿐 아니라 물질의 교환이 가능한 열린계가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는 주위에서 에너지를 흡수하여 안정된 새로운 구조가 출현할 수 있음’을 밝혔다. 어려운 개념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언급한 쓸모 없이 되어버린 에너지를 이용해서 이미 질서가 잡힌 구조인 생명체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배기가스에 포함된 이산화탄소는 식물이 자라기 위해 필요한 영양소가 된다. 무질서해진 에너지가 생명이라는 질서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한 셈이다. 그리고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한다는 의미의 ‘카오스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더 단순하게는 질서가 있는 것과 무질서한 것이 어느 경계선에서 만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한 쪽의 무질서가 다른 한 쪽의 질서를 만드는 원인이 되어 새로운 조직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또는 자기조립화(Self-Assembly)라고 부른다. 세상의 변화는 결국 엔트로피 법칙과 자기조직화라는 양방향에 의해 만들어 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은 순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로 자생적인 ‘붉은 악마’가 만들어지고, 붉은 악마의 조직이 또 다른 작은 응원모임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붉은 악마’라는 조직도 언젠가는 쇠태할 것이고 새로운 무엇인가가 생성되어 활동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런 조직화 중에 생명의 자기조직화에 어떤 규칙성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진화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화의 법칙이란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진화이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종 내에서 다양한 생물체가 보이는 사실은 누구라도 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메바에서 시작해서 원숭이가 되고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대진화 이론을 지지해 주는 과학적 자료는 그렇게 명백하지 않다. 하지만 진화의 법칙에 있어 분명한 것은 모든 생물은 그 살아가는 환경에 적응하며 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법칙은 우주를 다녀온 씨앗이 지구에 남아있는 씨앗과 다르다는 사실만으로도 받아 들일만 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우주선 육종을 추진해온 중국의 경우, 우주를 다녀온 품종 즉 식물의 씨앗들 중에서 기존 품종에 비해 새롭거나 뛰어난 것들을 찾아냈다. 우주정거장은 우주 공간에서 날아오는 다양한 우주방사선이 존재할 뿐 아니라 진공과 낮은 자기장 등으로 지구와는 다른 환경조건을 가지고 있다. 지구 환경에 수억 년 동안 적응 진화해온 생명체들이 이런 우주환경에 노출되어 단 몇 개월 또는 몇 일만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생존 경쟁의 세계에서는 환경의 상태나 변화에 적합하거나 잘 적응하는 것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멸망한다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된다. 현재 우리와 함께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은 그런 의미에서 환경에 잘 적응해 온 후손들이다. 정말 대단히 운이 좋거나, 능력이 뛰어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자연의 법칙은 당연히 인간의 삶에도 적용된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 인간의 삶에 고유한 법칙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 법칙도 자연의 법칙에 기초하거나, 최소한 자연의 원리에 위반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연예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법칙이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확신은 가질 수 있다. 약 150년 전에 찰스 다윈은 왜 공작이 생존에 불리한 화려한 꼬리깃털을 가지고 있는지에 흥미를 가진다. 꼬리깃털은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거추장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다윈은 결국 꼬리깃털은 우수한 배우자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경쟁의 도구라는 결론을 얻는다. 다윈의 이런 성선택 이론으로 동물들의 짝짓기 행동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욕망의 진화>의 저자 데이비드 버스David M. Buss는 이러한 성선택 이론을 인간에게 적용하여, 인간의 사랑과 연애 그리고 섹스를 생존과 번식을 위한 전략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남성의 경우는 가능한 많은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비교적 한 여성에게 충실하지 못한 반면, 10개월을 자신의 몸에 아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 키워야 하는 여성은 남성에게 충실히 그들을 지켜줄 능력과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남성은 양(量)을 여성은 질(質)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남자는 모험을 감행하고 여성은 심사숙고하고 ‘노(No)’라고 말하는 것을 먼저 배운다. 이런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연예불변의 법칙도 이런 법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허긴 이런 자연의 법칙 조차도 현대의 도시생활에 적응하며 진화하면서 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를 가지는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엉터리 종교도 정말 절실하게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단 엉터리 종교는 정의상 진리로부터 먼 것이기 때문에 신앙자의 평화가 오래 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종교도 사상도 모두 자연의 원칙에 부합되거나 최소한 그 일부를 포함하고 있어야 오래 갈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인간사회에 대한 법칙은 자연의 법칙만큼 확정적이지 못하다. 지난 과거나 현재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설명할 수는 있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아직은 미지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경제학이 얻어낸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가격의 변동을 그리고 가격의 변화로 인한 시장의 수요와 공급물량 변화를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칙으로 시장의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시장의 다른 많은 변수들이 함께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사회학자들은 이런 사회현상을 생물에 있어 식물과 곤충이 공진화하는 것에 비유하여, 사회도 공진화한다고 설명한다. 자연에서의 공진화란 여러 종류의 생물이 상호 영향을 주면서 진화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어느 하나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변해간다는 말이다. 우리는 가끔 현재를 이해하는 것 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미래의 불확실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자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이 복잡한 세상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웬만큼 설명할 수는 있게 되었다. 따라서 “세상은 복잡하지만,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