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제 1 교시 교육학 시간: 단어에서 이야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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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멘토, 2000>의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는 이전 일은 다 기억하면서도 새로운 일은 10분마다 잊어버리게 되는 기억상실증 환자다. 전직이 보험 수사관이었던 레너드에게 기억이란 없다.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던 날의 충격으로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이름이 레너드 셸비라는 것과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는 것, 그리고 범인은 존 G 라는 것이 전부다. 새롭게 얻은 정보는 잠시 후 모두 사라진다. 짧은 기억력을 극복하기 위해 레너드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메모하고 심지어는 문신으로 새겨 넣는다. 만나는 사람은 모두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찍어 두고 만남의 내용을 기록해 두어야 그들을 기억할 수 있다.


레너드가 기억을 못하는 이유는 해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뇌 속 해마에 이상이 생기면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다. 기억 상실증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역행성 기억상실증은 과거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고, 선행성 기억상실증은 지금 있는 일의 기억이 10분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이다. 레너드는 말하자면 선행성 기억상실증 환자다.


우리의 장기기억용량은 말했다시피 2,000만권에 달하는 책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하다. 하지만 인간의 단기기억에 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사실 모든 문제가 인간의 단기기억 용량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컴퓨터에는 램(RAM: Random Access Memory)이라는 장치가 있어 필요한 정보를 단기로 기억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컴퓨터가 실제로 어떤 작업을 하려면 램 상에 정보가 떠있어야 한다.아무리 좋은 컴퓨터도 한 번에 작업할 수 있는 한계는 램 상에 떠있는 정도다. 따라서 해야 할 일이 많다면, 나누어서 할 수밖에 없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는 많은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지만, 실제로 일하는 데이터는 램 상에 불러온 것들뿐이다. 읽어 들인 정보는 이제 램 상에 머물면서 작업에 사용된다. 컴퓨터의 단기기억력은 점차 좋아지고 있어, 웬만하면 512메가 바이트 정도 된다. 우리 인간도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필요할 때 마다 찾아서 단기기억에 띄워 놓아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단기기억은 컴퓨터의 램에 해당한다.


우리는 수시로 눈, 코, 귀, 입 그리고 온 몸의 감각기관에서 받아들인 정보를 처리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위치에서 주위를 한번만 둘러보기만 해도 엄청난 양의 사물과 소리가 눈과 귀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처리해야 한다면 우리의 두뇌는 엄청난 부담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이들 정보 중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만 선택적으로 끄집어내어 주의를 기울여,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만 장기기억으로 보내 저장해 놓는다. 그것이 해마의 역할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면, 이 장기기억에서 필요한 것을 떠올려 단기기억으로 가져와야 한다. 현재 이 순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단기기억인 셈이다. 문제는 우리 인간의 단기기억 능력은 형편없다는 데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의 단기기억을 숫자로 이야기 하면 7에서 더하기 빼기 2 정도의 정보뭉치 정도다. 천재소리를 듣는다면 한번에 기억할 수 있는 정보뭉치가 9개 정도 된다.

우리 컴퓨터 CPU안에는 레지스터라는 작은 방이 있다. 이곳은 램에 기억되고 있는 정보가 불려와 실제로 연산에 사용되기 위해 잠시 대기하는 곳이다. 컴퓨터는 단기기억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16비트 레지스터를 한 항목의 기억용량으로 보면, 우리의 단기기억은 7개의 16비트 레지스터에 해당한다. 8비트가 1바이트에 해당함으로 우리의 단기기억 용량은 14바이트 정도다. 컴퓨터의 램이 512 메가 바이트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단기기억 능력은 한마디로 형편없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한번에 7개 이상의 정보덩어리를 기억하기 어렵다. 보통사람들이 일곱 혹은 여덟 개의 숫자로 된 전화번호는 쉽게 받아들이지만, 그 이상의 숫자를 가진 전화번호는 한번에 기억하기 쉽지 않다. 물론 7개의 단기기억 용량은 7개의 숫자나 7개의 글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단기기억의 용량이 보통 7개로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덩이 짓기’ 라는 방법에 의해 확대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덩이 짓기’란 기억대상이 되는 자극이나 정보를 의미 있게 연관시켜 하나의 덩어리로 묶는 방법을 말한다. 1, 3, 9, 2라는 4개의 숫자는 4개의 정보다. 하지만, 이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해인 1392년으로 묶는다면 하나의 항목이 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왕은 27명이 있다. 이 모두를 한번에 기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광인효현 숙경영, 정순헌철 고~순’하는 식으로 7개를 하나의 정보로 묶으면 4개의 정보덩어리가 되어 비교적 쉽게 저장하고 또 기억해 낼 수 있다. 이처럼 제시되는 자극들을 의미가 있는 하나의 단위로 묶을 수 있다면 묶음이 하나의 덩이가 된다.

영어의 알파벳이나 한글의 자모는 단어로 묶을 수 있고, 단어는 다시 문장으로, 문장은 이야기로 덩이 짓기가 가능하다. 여러 단어를 외울 때 한두 개의 문장으로 만들면 더 쉽게 외우는 것도 기억단위가 단어에서 문장으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린네, 해켈, 샤통, 위태커라는 사람이름을 암기해야 한다고 해보자. 낯선 이름인데다가 발음조차 쉽지 않아 한번에 암기하는 것이 용이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들의 태생을 알고 있어 스웨덴의 린네, 독일의 해켈, 프랑스의 샤통 그리고 미국의 위태커라 기억한다면 어떨까? 또 이들 모두 생물학자들로서 시대별로 나열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더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외워야 할 용량은 더 늘었지만, 단순히 4개의 이름을 암기하는 것보다는 효율적일 수 있다. 언급하였듯이 각각의 이름에 주소를 부여하고 하나의 독립적인 단어가 아니라 의미 있는 단어의 묶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장이 모이면 이야기가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나의 정보로 기억하는 예를 들어보자. 유레카라는 말은 절박한 상황에서 찾아낸 기발한 아이디어나 획기적인 기획, 차별화된 기술 등을 의미한다. 유레카는 하나의 단어다. 하지만 유레카라는 말이 사용된 어원을 이야기로 기억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정보덩어리가 될 수 있다. 유레카는 왕관을 손상시키지 않고 금의 순도(純度)를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은 아르키메데스가 마지막 순간에 목욕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유레카!” 라고 외쳤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유레카(Eureka)란 그리스어로 ‘발견했다’는 뜻이다. 이처럼 이야기로 기억하고 또 학습한다면 많은 정보를 한번에 기억해 둘 수 있게 된다. 사람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직업이나 배경을 덧붙이거나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말이나 글로 익혀진 기억을 심리학자들은 지식기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지식이 책이나 인터넷에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체험적으로 얻은 지식도 있다. 이런 지식은 ‘산 지식’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삶 속에서 의식하지 않으면서 익혀지는 지식도 있다.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놀면서 깨우치는 지식들이 그런 것이다. 자전거 타는 방법을 책한 권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냥 몇 번의 넘어짐으로 그 방법을 배운다. 바닷가 아이들은 누가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또래 아이들과 놀면서 수영을 익힌다. 머리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지식기억은 어떤 계기가 없으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반면 스스로 체험하면서 얻어진 경험기억이나, 몸으로 익혀놓은 방법기억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식기억과 경험기억이 완전히 별개의 것일 수 없다. 책에서 얻은 간접경험을 실천하다 보면 온전히 자기의 것이 될 수 있으며,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 생각하고 깊이 사색하다 보면 지식기억이 된다.

자신이 얻은 지식을 친구들에게 설명하다 보면 지식기억이 일종에 경험기억으로 남게 될 수도 있다. 지식기억과 경험기억이 이처럼 서로 보완하면서 기억의 폭과 깊이가 확대될 뿐 아니라, 기존의 경험과 학습에 의해 얻어진 기억을 통해 우리는 주어진 정보를 더 잘 묶어 낼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바둑 고수는 대국을 치른 뒤 수의 진행을 완벽하게 복기한다. 초보자에게는 바둑돌 하나하나가 한 개의 기억단위인데 반해, 고수들은 대국의 진행과정을 몇 개의 ‘덩이’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CEO>는 경제활동에 필요한 지식을 생각, 사람, 시장 그리고 지원으로 나누고 각 분야는 다시 4개에서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장이 사실은 대학에서 한 과목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각 과목의 중요한 아이디어를 모두 7개의 항목으로 정리하였다. 한 학기에 배워야 할 지식을 단 몇 페이지로 축약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는 일이지만, 실용성을 가지기 위한 노력이다. 그 이상 되어서는 기억하기도 쉽지 않지만, 필요할 때 끄집어내서 사용하기 어렵다. 협상의 7가지 원칙, 마케팅의 7가지 법칙, 소비자의 7가지 특성 등이 그것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전공에 집중해야 한다. 일상은 사는 우리들의 입장은 다르다. 그 모든 지식이 시험을 볼 때처럼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그렇게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아무리 복잡한 지식이라도 7개 안팎의 이야기로 압축해서 정리해 둘 수만 있다면 매우 유용한 지식이 된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정보뭉치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경험할 지도 모른다.


전문가일수록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해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의 정보 뭉치가 크기 때문이다. 지식을 습득할수록 한번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끝없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 밖에도 우리에게는 적게 잡아도 두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그 하나는 덩이 짓기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이야기할 분해하기, 상상하기, 통합하기, 따라하기, 이야기 만들기와 같은 생각의 기술들이 그런 것들이다. 두 번째는 훈련을 통해 매직넘버 7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에게 무의식이라는 잠재된 능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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