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이 지속되다 보면 결국에는 늘 두 명의 거인과 수많은 난쟁이가 존재하거나 아예 모든 난쟁이는 사라지고 두 명의 거인과 단 한 명의 소인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세상이 만들어 진다.
좀 더 현실적인 시장을 살펴보자. 우리들이 만나는 시장도 많은 기업들이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1위와 2위라는 거인과 그 반에도 못 미치는 3위 그리고 아주 작은 많은 기업들만 남게 되어 있다. 아주 작은 기업들이 남아 있는 경우도 사실은 3위까지의 거인들이 들어가기에는 작은 시장에서 제한된 활동을 하거나, 거인들에게 제품의 일부를 납품하고 있는 기업들 뿐이다. <빅 3 법칙 The rule of Three>의 저자 잭디시 세스(Jagdish Sheth)와 라젠드라 시소디어(Rajendra Sisodia)는 이런 작은 기업들을 스페셜리스트라고 부른다. 당연히 빅 3는 제너럴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콜라 시장은 어떤가? 미국뿐 아니라 세계시장은 단지 두 거인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두 거인의 싸움이 되고 있다. 한 때 한국에 콜라의 독립을 외치며 8.15콜라가 있었지만 결국 시장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만해도 신세기 한솔과 같은 경쟁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SK, KTF, LG만 남아 각각 51%, 32%, 17%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잘했어 ~! 라이코스~” ”라는 광고 카피를 기억하는가? 한 때 엄청난 광고비를 쏟아 부으며 포탈사이트 경쟁을 벌이던 회사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 오늘 날 우리나라에는 네이버와 다음 그리고 나머지 포탈이 있을 뿐이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기업하면 GM, 포드 그리고 크라이슬러였다. 1920년 말에 미국에는 500개가 넘는 자동차 회사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잘 알다시피 GM, 포드, 크라이슬러라는 빅 3만 남아 있다가 그나마 크라이슬러는 다국적연합인 스텔란티스(Stellantis)그룹에 속하여 그 DNA를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적인 운동화 제조업체에는 나이키, 아디다스 그리고 리복이 있다. 이 외에도 맥주, 음료수, 항공기 제조업체, 전화회사 등 다양한 산업마다 그 시장의 70% 이상을 지배하는 소수의 기업들이 존재한다. 이처럼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각 산업의 대표주자들이 유독 3개인 것이 우연일까?

정치는 어떤가? 누구나 정치에 참여하고 정당을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지만, 어느 나라고 두 개의 거대 정당이 있고 다수의 소수정당이 자리잡고 있다. 정치라는 것이 여러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의 경쟁 법칙과 효율성 추구의 결과로 늘 불평등한 현상이 나타난다. 어떤 산업이고 새로운 시장이 생기면 자연히 경쟁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산업의 초기단계에서 다수의 경쟁자가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시작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해 비효율적인 기업들은 경쟁에서 도태되고 효율적인 소수의 기업들만 남게 된다.
사회학에는 갈등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무슨 특별한 이론 같지만, 사실은 기본적으로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분배의 문제가 인간사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누가 더 많은 몫을 가질 것인가가 사회가 성립된 이래 계속 이어온 주된 갈등이다.
이기적인 네트워크의 그들만의 리그
사람들은 늘 평등을 외친다. 하지만 세상은 늘 평등하지 못하다. 우리가 숨쉬며 살고 있는 대기는 78%이상을 차지하는 질소와 20%의 산소 그리고 아주 적은 양의 많은 다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를 자랑하는 건축물들도 몇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을 뿐이다. 인터넷은 분산된 네트워크를 상상하고 만들어 졌지만, 자연스럽게 허브사이트라는 리더를 만들어 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도 자신이 원하던 아니던 리더가 존재한다.
세상은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생명체도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사람도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기억도 네트워크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이 네트워크는 수 많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로 상호작용하며 변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 네트워크를 복잡계라고 부른다. 복잡계란 간단히 말하면 많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구성요소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이다. 세상의 대부분은 복잡계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하철, 전세계를 연결하는 항공망, 인터넷 등이 대표적 복잡계다. 또한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국가와 도시, 경제시스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 등 우리가 사는 일상 자체가 복잡계이다.
네트워크란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나의 새로운 구성요소만 추가되더라도 엄청나게 많은 링크가 새롭게 탄생할 수 있다. 기존에 존재하는 구성원 수만큼의 새로운 연결선이 만들어 질 수 있으니 말이다. 신설공항이 기존의 모든 공항과 항로를 새롭게 개설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사실 구성원들간에 상호작용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구성요소가 있다 해도 어떠한 복잡성도 없게 된다.
그런데 그런 네트워크에 늘 두 명의 리더가 만들어지고 경쟁과 협력을 통해 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인터넷에서의 리더는 바로 허브사이트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포탈사이트에는 네이버와 다음이라는 리더가 있고, 리더를 꿈꾸는 다수의 사이트가 경쟁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도 네트워크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네트워크의 리더는 마당발이나 토너먼트의 리더들이다. 마당발은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허브로 해서 움직인다.
리더란 어떤 조직이나 하나의 사회가 효율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그 리더가 능력을 상실한다고 해도 한 동안 그 체제가 유지된다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 인터넷에서 허브를 중심으로 모여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이 인터넷에서 허브를 집어 위로 끌어 올리면 다른 사이트는 허브의 아래로 배열하게 된다. 그 모습은 다름 아닌 군대나 회사의 조직도를 그려 놓은 것과도 같은 피라미드 형태를 가지게 된다.
충분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능력이 없거나 조직에 공헌을 하지 못하는 리더는 교체되고 새로운 네트워크가 만들어 질 것이다. 하지만 현실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한 번 토너먼트의 상위 그룹에 속하게 되면 즉시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 진다. 그곳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영속시키기 위해 서로 협력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리그에 들어오는 것을 방해한다. 더 나아가 그들의 몫을 정당한 것보다 더 많게 그리고 더 오래 가져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토너먼트의 이론에 따르면 사장의 연봉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하위 직원들에게 동기부여가 됨으로 합리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연봉이 많은 것은 토너먼트의 경쟁방식뿐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가 함께 만들어 낸 작품들이다. 우리나라도 유사하지만 미국의 은행 CEO와 금융당국의 리더 그리고 정부의 관료들 그리고 감독기관의 간부들 모두 하나의 네트워크로 이루어 져있으며 같은 리그에 속해있다. 서로가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서로의 수입을 올려주고 또 권력을 실어 준다. 말하자면 서로 “우리가 남이가?”하고 있는 셈이다. 불평등은 이런 시장의 진입장벽으로 더욱 불평등해 질 수 있다. 자신이 언제 리그 내의 다른 자리로 갈지도 모를 일이지만, 리그에 속한 사람들끼리 향유하는 자원이 많아지는 일을 마다할 리가 없다. 더 화려한 파티 그리고 더 비싼 점심 그리고 더 사치스러운 사무실들이 그렇게 만들어 진다.

아프리카의 스와질란드(Kingdom of Swaziland/Umbuso weSwatini)는 다른 아프리카의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잘사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일인당 GDP가 5,000달러 정도로 세계 101위인 가난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한 나라다. 30세에 이 나라의 왕좌에 오른 음스와티 3세는 현재 15명의 왕비를 아내로 삼고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왕비를 받아들일 것으로 보인다. 매년 스와질란드 왕비가 되고 싶은 10대 여성들이 매년 왕 앞에서 반 나체로 춤을 추는 행사가 매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도의 이 행사에는 7만 여명의 10대 여성들이 참여했다.
이슬람 국가들도 일부다처제를 당연시 하는 사회다. 혼자 살기 어려운 여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코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지는 일이 쉽게 이루어 지지는 않는다. ‘그들만의 리그’는 폐쇄적 일뿐 아니라 매우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간혹 그들의 리그에 새로운 강자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며 새로운 멤버 역시 그들과 협력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는 늘 최소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두 개의 리그로 나눠져 갈등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사회도 다양한 리더를 요구하고 있고 또 그 역할을 담당한다. 불평등 법칙인 80대 20의 법칙을 세상에 내놓은 파레토는 그런 리더를 엘리트라고 부른다. 엘리트라는 말은 처음에는 상품이나 사람 중에서 탁월함을 보여주는 최고, 최선의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창조적인 능력을 가진 소수라든가 책임과 사명 그리고 능력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는 지도적 인사를 의미하게 되었다.
반면 파레토에게 있어 엘리트는 사회의 각 영역에서 최고의 점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예를 들어 도적 중에서도 제일 뛰어난 도적이라면 그도 역시 엘리트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통치자나 리더를 의미한다. 이 리더가 역할을 하지 못하면 새로운 리더가 탄생해야 한다. 문제는 과거의 군주나 영주처럼 그들만의 리그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의 역사는 늘 지배자와 피지배자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족과 양반이라는 특수계급은 그들만의 위한 많은 장치와 제도를 만들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도 이제 경제발전과 함께 조금씩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인도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특권계급은 자신들의 특수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늘 사회전체의 이익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눈 앞에 보이는 이익에 집착한다.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함께 생산해 낸 가치를 누가 더 가져가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자가 만든 가치를 자본가가 자본이득이라는 명목으로 착취해 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으로 분류해 낸다. 마르크스처럼 한 사회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지는 않지만, 막스 베버(Max Weber) 역시 사회의 그런 갈등을 인정한다. 단 베버는 사회구조가 경제와 같은 단일변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위, 권력, 부 같은 다양한 사회적 변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 따라서 베버가 강조한 갈등은 계급간의 갈등이 아니라 지위 집단간의 갈등이다.

오늘 날에도 그런 경쟁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 날의 신흥 귀족은 재벌들처럼 기업의 오너들이다. <탐욕의 시대>의 저자이며 유엔인권위원회의 고문인 장 지글러(Jean Ziegler)는 세계는 다시 다국적 기업에 의해 봉건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신흥 제후들은 다국적 기업이다. 미국을 기회의 나라라고 불렀다. 능력을 키우고 노력만 하면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의 나라라는 말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비교적 신분상승이 자유로운 미국도 사실상 엘리트 사회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간혹 오바마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엘리트 사회로 진입하지만, 폐쇄적인 사회는 쉽게 열리지 않는다.
권력과 부 그리고 정보의 수단이 집중됨에 따라 그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룰에 적응하고 또 토너먼트 식 경쟁이라는 과정을 치러내야만 한다. 사회의 각 분야의 리더들은 그 토너먼트에서 최고의 지위를 점유하고 또 그 위치를 향유하고 있다. 누구도 쉽게 그 자리를 전체의 효율성을 위해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각 분야의 리더들이 자신의 고유영역을 넘어서 다른 분야의 리더들과 또 다른 네트워크를 만든다면 리더를 바꾼다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토너먼트의 하위단계에서 그 네트워크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슬픈 일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리더 그룹은 기업의 오너들, 기업의 최고간부. 상위 정치인들, 문화 또는 예술계의 유명인사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또 다른 네트워크를 만들어 협조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의 자리가 고대처럼 세습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만의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토너먼트에서 불공정한 시드를 차지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협조적이거나 같은 사회적 출신을 지원하게 될 것이다. 이런 계급간의 갈등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 일단 상위에 속하게 되면 나름대로 시장에 장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되어 있다.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자들도 토너먼트의 경쟁을 치러야 하며, 상위 레벨에 들어서면 자신의 네트워크를 폐쇄적으로 만들어 놓는다. 의도적이던 아니던 경제학은 수학적 능력으로 순위를 결정한다.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박식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의 용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결국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 토너먼트의 참여자들은 언어를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도 하고 협력도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라도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협력을 거부하기도 한다. 또한 협력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끼리만 협력하는 이기적인 협력은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소위 집단적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사회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점점 좁아지고 있는 이 세상에 아직도 이기적인 협력에 의한 집단의 이기주의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실이다. 집단적 이기주의는 ‘이기적인 유전자’와 같이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중요한 현상 중 하나다. 1932년 출간되었으며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책 100권에 선정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사회내의 어느 집단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모한다” 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도덕적인 사람들도 그러니 이기적인 사람들만 모인 집단의 이기주의는 어떠할까 상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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