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휴대폰을 들고 나와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고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투자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편하게 그리고 큰 의심없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투자환경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1600년 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투자의 역사가 기원전 1700년경에 작성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법전은 투자에 대한 보장을 위해 담보를 사용하는 규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런 규정이 투자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투자 이야기는 아무래도 유럽의 17세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때부터 주식 거래, 증권 거래, 은행 등 현대 투자 구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투자의 역사가 1600년경에 시작했다고 하면 지금까지 금융 투자의 역사는 대략 400년에 불과합니다. 그럼 1600년 전 후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보통 최초의 주식 시장에 대한 정보를 온라인에서 찾아보면 거의 항상 그곳에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가 나타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가 세계 최초의 주식 거래시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미 유럽 전역에 유사한 기관이 생겨나고 있었으며, 이전부터 주식시장과 유사한 거래소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Fernand Braudel의 1983년 저서 “The Wheels of Commerce”에의하면 이탈리아의 피렌체에는 1328년 당시 거래소가 있었으며, 제노아에도 중세 시대 내내 활발한 주식 시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밖에 독일 도시와 프랑스 도시에서 주식 시장 및 주식 시장에서 지역 광산 주식이 거래되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증권거래소는 아이러니하게도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arp)에서 발전된 금융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6세기에 유대인들이 유럽의 여러 해안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업과 안전을 보장하는 곳이면 어디든 살아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브뤼헤, 앤트워프, 암스테르담, 런던, 함부르크 등 여러 도시에 그들의 정착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해운, 무역, 어업에 종사했으며, 이들을 ‘항구의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단결력이 높아 유럽 전역에 상거래망을 형성했으며, 특히 앤트워프에서 보석 거래에서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의 활동이 금융산업으로도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번영하던 앤트워프의 금융시장은 스페인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앤트워프는 스페인 합스부르크령이었는데,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신교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명령으로 스페인군은 1576년 11월 앤트워프를 포위하고 시민 7,000명을 학살했습니다. 이 학살 사건 이후 앤트워프의 금융 및 무역 센터 기능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 때 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면서, 금융 시장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01년 설립되어, 1799년까지 운영되었습니다. 1600년 이전까지는 투자자들은 동방과 무역하는 상선의 지분에 투자했습니다. 여러 척의 상선에 나눠 투자함으로써 한 척이 난파되었을 경우의 위험을 분산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등장하자 투자자들은 이제 개별 상선이 아닌 회사의 소유권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로는 혁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1600년대 금융 시장 혁명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법인이라는 사회적 기술의 발명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술의 발전으로 기업가들은 회사를 설립해 소멸 기한 없는 주식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고, 주주들은 이 주식에 투자하고 필요하면 다른 투자자에게 팔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이렇게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는 잠재 투자자를 투자 기회와 연결하는 동시에 기업가를 위해 자금을 모을 수 있는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장은 유동성, 공개된 가치, 방송 가용성 및 낮은 거래 비용을 제공하면서 투자를 표준화하기 시작하였고, 이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의 성공적인 실험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제 막 금융 투자 역사의 첫번째 무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Global Financial Data의 수석 경제학자인 Bryan Taylor는 이 후의 금융시장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 독점 시대(1600-1815): 이 시대에는 정부 채권과 정부 지원의 monoplies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적이었습니다. 1719-1720년의 거품 이후에는 주식이 채권처럼 거래되었으며, 투자자들은 안정적인 수익보다 자본 이득을 추구했습니다.
- 세계화 시대(1815-1914): 이 시대에는 주식 시장이 확장되고 세계화되었으며, 정부 채권보다 주식의 중요성이 증가했습니다. 운송, 통신, 금융, 유틸리티 등의 새로운 산업이 금본위제 하에서 자본을 유치하고 세계 경제를 성장시켰습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세계화된 금융 시장은 붕괴했습니다.
- 규제 시대(1914-1981): 이 시대에는 정부가 금융 시장을 통제하고 규제하였으며, 국가별로 분리되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고유가 등의 위기가 발생하였으며, 많은 산업이 국유화되거나 규제되었습니다. 금융 시장의 성장과 다양성이 제한되었습니다.
- 재세계화 시대(1981-현재): 이 시대에는 금융 시장이 다시 세계화되고 비공개화되었으며, 아시아와 다른 신흥 시장이 성장하였습니다. 기술, 특히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이 금융 시장을 변화시켰습니다. 금융 시장은 하나의 통합된, 24시간 운영되는 시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Bryan Taylor는 1600년부터 1815년까지를 독점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법인의 설립과 거래소가 이제 막 시작해 태동을 알리던 시절인데 왜 독점의 시대라고 명명하였을까요? 당시 금융 시장은 정부 국채와 소수의 국영 독점 기업들 만의 시절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600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된 후 200년 동안, 금융 시장에서 거래되던 유가 증권은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더구나 1719-1720년 거품이 붕괴된 후 이후, 주식은 채권처럼 거래되었으며, 투자자들은 주가 상승을 통한 이익보다는 안전한 수익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688년에 출간된 조셉 드 라 베가의 책 “혼돈 속의 혼돈(Confusion de Confusiones)”은 암스테르담 유대인 사회를 통해 주식 시장의 내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1698년 1월에는 런던 주식 시장 소식지 “Course of the Exchange”가 격주로 발행되었고, 런던 커피점들에서 수집한 주가가 게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금융언론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발달하기 시작한 금융시장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1719년~1720년 사이에 발생한 거품입니다. 영국 주식의 시가총액은 1688년부터 1720년까지 꾸준히 상승합니다. 주식 투자의 광풍이 주가를 지속할 수 없는 수준까지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1637년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튤립파동의 경험이 무색하게도 1720년 영국의 남해회사의 주식의 폭락과 프랑스의 미시시피 계획(Compagnie du Mississippi)의 붕괴와 같은 사건들이 금융시장 발전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이런 거품이 붕괴된 이후, 기업들의 신주 발행은 제한되었고 이후 한동안 1700년 대에 신주를 발행한 기업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다시 투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은 산업 혁명입니다. 개인들이 삶이 개선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 잉여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은 18세기 중반 유럽 대부분을 강타하였으며, 시기적으로 1760년에서 1840년 사이가 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대중이 경제적 흑자를 공유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직장에서 저축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축이 돈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고 따라서 은행산업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개인이 경제적 여유를 가지게 된 것과 함께 운하와 철도와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에 자금이 필요하게 된 환경이 다시 금융시장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 시작합니다. 투자자들은 운송 관련 주식에 투자해 믿을 만한 배당금 뿐만 아니라, 주가 상승을 통해서도 수익을 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100년 동안, 이 같은 주식이 수 천 개로 늘어났으며, 유럽과 세계 다른 여러 나라들을 통해 자본이 자유로이 흘러 다녔고, 투자자들은 전 세계에 투자해 수익을 최적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00년대 JP Morgan, Goldman Sachs, Lehman Brothers 등이 설립되었으며, 1850년대부터 런던과 파리의 상업 은행가들은 미국 전역의 산업 확장에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하여 대륙 횡단 철도와 같은 성공적인 투자 프로젝트로 이어졌습니다. 10년 후, 동일한 금융 기관은 연방 정부가 미국 남북 전쟁에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돕기 위해 수백만 달러 상당의 채권을 판매하기도 하였습니다. 은행은 주요 후원자부터 개인 투자자까지 모든 투자자가 프로젝트가 전 세계 어디에서 진행되는지에 관계없이 이와 같은 프로젝트를 후원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주식 시장이 본격적으로 확대되고 금융 시장이 세계화되기 시작합니다.
이 세계화된 금융 시장의 시대는 1914년 7월 31일로 막을 내리고 세 번째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세계 금융 시장은 문을 닫았고 전쟁 동안 모든 자본은 오로지 전쟁을 위해서만 쓰여졌습니다. 종전 후, 금융 시장의 세계화가 다시 시도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국가적 차원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럽에서 많은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었고, 미국도 산업을 규제하였습니다.
1980년대가 되어서야 규제 완화와 민영화의 물결이 전 세계 주식 시장에 몰아쳤고, 다시 한 번 세계화가 진행되기 시작됩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시작되었으며,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도 주식 시장을 개방해 세계 금융 시장에 참여하였습니다.
1929년 주식 시장 붕괴와 그에 따른 대공황으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 사건이 투자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정부가 경기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케인즈 식 경제정책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습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은 바로 그 이론의 실험실이 되었으며, 루즈벨트는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도록 막대한 정부 지출을 약속합니다. 이 뉴딜 정책으로 미국 전역에 도로, 댐, 교량, 터널 및 기타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다시 미국에 투자하기 시작했으며, 전 세계의 다른 나라들도 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슷한 정책을 사용하였다.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많은 투자 대상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뉴딜 정책 외에도 대공황 이후 투자에 있어서 또 다른 큰 변화는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설립한 증권거래소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법안의 제정으로 미국 전역의 거래소는 주식, 채권, 사채를 포함한 2차 시장에서 보다 쉽게 거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즉 1950년대와 1990년대 사이에 현대 투자 이론과 시스템이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컴퓨터의 발전과 인터넷 그리고 모바일 통신이 더 해지면서 우리가 움직이면서 주식시장을 살펴보고 집에 앉아서 투자를 할 수 있는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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